섬과 안개

이 편지를 쓰지만 너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 지 모르겠어. 네 이름은 너무 단순하여 너를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너를 부르고 싶었어. 아주 길고 긴 이름. 네 이름을 부르다 보면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르고, 때론 행복과 슬픔이 어우러지며, 그리움으로 변하는 그런 이름이 나에겐 간절하게 필요했어. 오늘은 더 그래.

어리석게도 사랑과 우정이 초라한 열정에 뒤덮혀 아뭇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하지만, 몽매한 탓에 대지와 너의 눈길 가운데 나를 놓아두지 못하고, 덧없는 관념과 같은 것, 지식과 같이 뼈와 살이 없이도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창문을 닫고 세상과의 관계를 끊은 채, 책을 잔뜩 쌓아놓고 지냈던 것 같아.

지난 여름, 열 아홉살의 나에게 퍼부어진 자유분방한 시간들 속에서, 초라한 갈증조차 이 세상이 해결해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더한 갈증 만 가슴 속에 자라나는 것을 보고, 세상의 구석으로 돌아가 학교와 집, 그리고 집 앞의 공터와 마당, 그리고 초라한 책상 위에 녹슬고 있던 책 속에서 머물기로 했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품점 유리 그늘에 비친 나의 초췌한 몰골을 보았어. 먼지처럼 덧없는 글자 속에 묻혀 아무 것도 건져내지 못한 나를 발견했을 뿐이야.

낮에 배를 타고 섬으로 왔을 때, 헐벗은 나무가지가 하늘 아래 드러났고, 쓸지 않은 낙옆들은 메마른 섬 위에 가득했어. 가을이 가버렸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지. 머지 않아 겨울이 올 것이고, 추위가 거리를 덮칠 것이야.

친구들은 섬 위에서 소리치며 공을 차고 놀았어. 하지만 가을을 놓치고 말았다는 자괴감 때문인지 나는 즐겁지 않았어. 오후의 지친 햇빛 아래,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의 끝에 헐벗은 가지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풍경이, 나의 우울 속으로 먹물처럼 스며들었고, 가슴의 공허 속으로 한강 중류의 좁은 산과 산 사이로 떠오르던 노을이 삼분지 일 쯤 들어 앉았지. 가을의 끝은 단가(短歌)처럼 조용하고 아름다웠어.

밖에는 비가 내려. 지금은 11월의 새벽 두 시.

불이 들지 않는 방갈로 안에는 친구들이 서로를 껴안고,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며 잠을 자고 있어. 메마른 낙옆 위로 내리는 비는 처음에는 싸아하고 흐느끼더니, 낙옆이 비에 젖었는지 빗소리는 잦아들었어.

추위 때문에 몇번인가 깨어난 나는, 어둠 저편에 있는 새의 비명소리를 들었어. 대양을 건너 온 밀림의 소리였고 외로움이 살(肉)을 갈라내는 소리였어.

잠결이었지만 ‘괴로운 것인가? 저토록 처절한 소리라니. 본연의 소리인가? 갇혀 날지 못하는 운명을 저주하는 것인가? 아니면 깃털 위에 형벌처럼 차갑게 내려앉는 빗줄기 때문일까?’ 하고 물으며 다시 잠을 청했어.

끄와악! 꽈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에 깨어났어. 살과 뼈 사이에 추위가 박혀 더 이상 잠들 수가 없었어.

깨어난 나는 새의 울음 소리를 기다렸지만, 새는 더 이상 울지 않았어. 꿈 속의 울음이었을까?

친구들의 짙은 살냄새로 꽉 들어찬 방갈로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

마지막 남은 계절이 가을비에 빙점으로 젖어가는 미지근한 냄새가 추위 사이로 감돌았어.

빗줄기는 보이지 않고, 얼굴과 팔뚝에 섬뜩 섬뜩 빗방울이 내려 앉았어. 빗방울이 내 살 속을 파고 들며 반짝거리는 느낌이었어. 그리고 이명처럼 풀들을 물들이는 빗소리!

새는, 울부짖던 새는, 어디 있을까? 더 이상 울지 않았어. 괴로움이거나 외로움에 죽어버렸을 지도 몰라.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한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기에, 삶을 한 순간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지도 몰라. 사랑과 같은 것, 우정 그리고 흘러가는 행복들을, 한번도 진정으로 껴안지 못한 탓에, 모호한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흘려버리고, 거짓된 열망을 쫓아 방황하는 것인지도 몰라. 그래서 세상은 진실이겠지만, 나만 거짓으로 가득한 지도 몰라.

새를 찾아서,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섬의 끝으로 갔어. 풀잎에 맺힌 물방울이 발목을 적셔. 왠지 등줄기가 서늘한 데, 외로움일까.

어두운 섬에서는 가을날의 끝에 사라질 냄새들이 피어올랐어. 아침이 밀려오는 느릿한 냄새, 낙옆이 썩어가며 내는 얕은 술 내음 같은 것, 그리고 어둠 속에 번지는 적막이 질러대는 소리.

밤은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인지… 새를 찾아낼 수는 있을까?

풍경은 어둠 속에 갇혀 있고, 나도 갇혔어. 시간마저 어둠의 볼모가 되어 있는지도 몰라. 단지 가느다란 빗소리의 아우성들이 낙엽 위로 내려앉는데, 그 소리는 어둠을 씻어 내리기 위한 신음이었어.

강 가로 다가 갈수록 어둠은 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 어둠 가운데로 더 어둡고 깊은 혼돈의 웅덩이가 착시처럼 불쑥불쑥 뜰 위로 번져갔고, 어둠의 나락에 빠질까 걸음이 흐트러졌어.

뜰 저편에 화톳불이 보여.

붉은 불의 음영을 뒤집어 쓴 채, 무망에 절은 듯한 두 사람이 쪼그리고 불 앞에 암울하게 앉아 있어. 그 옆을 지났어. 화톳불 옆, 나무탁자 위에는 음식물과 술병들이 어지러웠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나를 보자 절망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던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불을 보았어. 화톳불은 빗물에 젖어 생기없는 붉은 색으로 단조롭게 흔들렸고, 온기를 느낄 수 없었어. 그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한 것 같았어. 하지만 가던 길을 다시 가기로 했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단지 발끝을 스치는 풀소리와 어둠이 이끄는 곳으로 갈 뿐이었지.

얼마 가지 않아, 숲의 메마른 가지 사이로 하얀 빛의 장막이 펼쳐졌어. 숲 사이로 연극무대라도 펼쳐진 게 아닌가 했어. 하지만 조용했지. 숲 사이를 지나자 섬의 끝, 강 가였어. 거기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어. 빛이 안개에 결박된 채 아우성치고 있었지. 빛들이 안개에 갇혀 떠돌고 있었어. 섬 가장자리의 숲을 경계로 안개가 일진일퇴하며, 빛의 장막을 이루고 있었던 거야. 꿈을 꾸듯 빛의 장막을 헤치고, 두려움과 영탄으로 빛 속으로 들어갔어. 형광등의 아르곤 가스 속에 들어선 것처럼 강변은 축축하고 온통 빛이었어. 안개가 나를 둘러 에워싸고 있어서 동굴같았어. 빛이 날아오는 곳의 반대 쪽에는 안개가 벽이 되어 나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오르기도 했어. 황홀한 게 이런 기분인가봐.

강 가로 내려섰어. 북한강이 먹빛 물결을 그리며 뒤척였어. 차갑게 식은 섬에 벌거벗은 강이 부딪혔어. 부딪힌 강은 신음처럼 하얀 김을 토해냈어. 밤이 강물소리를 내며 목욕하는 뿌연 김 같기도 했고, 산천의 정령들이 동이 트기 전에 하늘로 되돌아가는 모습같기도 했어. 나는 늘 그런 영혼을 꿈꾸었어. 내 속에 있는 그따위 것이 영혼이라고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어. 하얀 김은, 수면을 따라 흐르던 다른 김과 섞이고, 추운 대기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비벼대며 안개가 되었어. 섬 건너편 391번 지방도로 가에 점점이 서 있는 가로등에서 날아온 수은등 빛이, 강에서 갓 태어난 안개의 입자에 부딪혔고, 다시 깨졌어. 깨진 빛조각들은 다른 입자에 다시 부딪히며 아득한 정적의 소리를 질러댔지. 다시 섬의 외등빛이 그 위에 몸을 섞었어.

그렇게 안개는 섬 변두리의 숲과 가지에 막혀 빛을 포옹하고 춤추고 있어.

안개에 갇힌 빛은, 안개 속에 산란하고 또 산란된 빛을 다시 흡수하면서 안개빛이 되었어. 안개빛은 풀리며 춤을 추듯 검은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가거나, 섬 주변으로 풀려지고 스몄어.

잎이 진 은행나무의 단조로운 가지와 미루나무, 은사시나무의 가지들이 안개빛이 섬의 내륙으로 진입하는 것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을 뿐이었지.

안개빛 속에서 마치 내가 유광체라도 된 것처럼 몸에서 분말같은 빛 조각이 깨어져 내렸어. 팔뚝에도 빛이 어른거렸고, 조만간 모든 세포가 빛으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빛에 녹고 희미해져 가던 나는, 황홀하고 쓸쓸한 탓에 빛과 안개가 만들어 내는 광경을 누군가 함께 보고 싶었어. 그렇게 문득 외로움과 마주했는데, 외로움에서 끼쳐온 적막으로 부터 어린 시절에 보듬어야 할 마지막 낱말을 떠올렸던 같아.

너의 이름을 불렀어. 그리고, “나, 지금 여기에 있어.” 섬 건너편 도로가 흐르는 강물을 따라 달리다 보면 다다르게 될, 네가 잠자고 있는 곳을 향하여 소리쳤어.

목소리가 나로서도 믿을 수 없게 애절했는지, 가슴 속에서 다시 울렸어.

있지도 않은 시간에, 존재하지도 않은 장소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어. 그리고 다시는 구체(具體)의 육신에 깃들어 거칠고 자명한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어. 이후, 조금 전과는 다른, 수억년동안, 끝없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궤도를 지나가는, 행성과 같은 외로움이 밀려왔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외로움말이야.

나는 사랑과 같은 것을 믿지 않았어.

잡을 수 없고 순간적이며, 자신 속에 있는 사랑조차 가늠할 수 없으며, 좋아함과 사랑의 경계조차 그을 수 없는 것, 서로 살을 섞고 나서야 간신히 그 미끄덩한 실체를 확인하고 쾌락으로 접어들거나, 지친 쾌락의 끝에 쓰레기통으로나 던져져 버리게 되는 그런 것이라고 치부했지.

하지만 지금 이 가슴은 영원하고 단일한, 통제될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은 감정에 꽉 차서, 운명처럼 빛과 안개로 가득한 섬의 끝으로 밀려온 것 같아.

한번도 너를 위하여 노래를 불러주지 못했던 나는, 지금 여기에서, 너의 부재 속에서, 뚜렷한 너의 현전을 받아들이며, 온몸의 밑바닥은 뒤집어져 심장이 밖으로 나오고 살갗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통증과 아픔이 사라진 후 밀려오는 고요와 같은 것이 뒤섞이다 보니, 가슴이 얼얼해.

사랑하거나 묵혀두었던 가슴의 진실들을 퍼올려 편지에 써서 부쳐야 할 이 가을에, 너를 방치해 둔 채, 보잘 것 없는 책 속에 코를 박고 지내왔다는 어리석음에 치를 떨었어. 아랫도리가 시리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며, 이 밤의 온갖 것들로부터 너의 향기를 느끼고, 지금까지 너와 보낸 시간들을 이 순간 속에 응축시키고, 폭발시킴으로써, 영원의 끝에 있는 곳까지 다가갈 것 같아.

형용할 수 없는 이 감정을 너에게 전할 수 있을지…

노을이 서울의 서편 낮은 들 위를 채우던 어느 날, 친구 집 창 밖에서 친구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기다렸던 적이 있어. 한 시간인가 서성거린 끝에 친구의 피아노 소리가 들렸지. 그 순간 친구와의 우정은 이미 가버렸지만, 그보다 더한 우정이 내 가슴에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더한 우정이 가슴을 채웠지만 서로가 더 이상 해맑은 웃음을 함께 나눌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 그리고 앞으로 둘 사이의 우정이 더 이상 향기를 지니지 못할 것이며, 순수를 잃어버림으로써 현명해지거나 타락하는 것이라는 느낌 탓에 먹먹했던 그때의 슬픔과, 지금의 이 감정은 말로 수습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많이 닮아 있어.

교정기를 반짝이며 웃음을 물고 있는 너의 입술과 알맞게 살이 오른 허벅지, 무관심이 담겨져 나로부터 약간 멀어져 있는 너의 눈, 그리고 그 아래로 반짝이던 주근깨들. 모두가 나뉘어 질 수 없는 너의 실체이며, 내 욕망의 뿌리라는 것은 미칠 것 같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야.

지난 여름과 가을, 의도적으로 방황했어.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않고 단지 생각만 하기 위하여, 뚜렷하고 전일한 탓에 전혀 글로 쓸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쓰고자 했던 탓에, 비로소 시작한 나의 젊은 나날들은 그만 속절없이 흘려가 버렸고, 그만큼 말라 비틀어졌을 뿐이야.

때로 너는 장난처럼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 내 가슴의 떨림에 솔직하지 못했던 나는, 믿지 않았어. 이런 터무니 없는 불신이 너를 외롭게 했던 것 같아. 시간이 흘러도 옹졸한 껍질에 갇혀 있던 나의 곁에서 외로움에 수줍게 떨며 장난처럼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너를, 가슴에 품어주지 못했던 죄악을, 무지요, 이기심 탓이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밖에 없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내가 지닌 절망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만 용서해주기 바래.

아니야, 이것이 다는 아니야.

여태까지의 이야기는 다 교묘한 거짓이야. 진실이더라도 더 큰 거짓을 가리기 위한 허울에 불과해. 지난 여름 바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너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어. 너에게 빠져들고 싶지 않았어. 그랬다간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거든. 내 속에 거만한 마음이 가득해서 너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길 바랐어. 하지만 너를 처음 본 순간, 알았어,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될 것을. 하지만 그런 감정에 휩쓸리려니 너무 무서웠어. 방향을 잃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거나, 하늘 저 멀리 날아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거든. 그래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책을 읽고, 산보를 하거나, 들었던 LP판을 돌리고 또 돌리며,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며 나를 속이려고 했어. 잘못은 거기서 부터야.

내가 유치한 글을 간혹 끄적거리곤 했던 것, 알지? 하지만 정작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은 허접한 글 따위는 아니었어. 편지를 쓰고자 했어, 온 여름과 가을이 다가도록, 내 마음을 다하여. 마음 속의 진실이 쓰면, 그 위를 교활한 거짓이 덮어쓰고, 자신의 비겁한 변명을 한 줄기의 용기가 틀렸다며 뜯어 고쳐가며, 자신의 더러움을 또 다른 부끄러움으로 가릴 수 밖에 없는 그런 편지를. 몇날 며칠을 고치고 또 고치고, 낮과 밤을 바꿔가며 다시 쓰고. 끝없는 자기 부정과 부인으로 점철되어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맥락도 없고, 쓰고 지운 글 자국 사이로 땀과 눈물이 몇번이고 흐르다 말라붙은… 그리고 가을이 끝날 무렵이면, 무슨 말을 하려고 쓴 것인지 나조차 알 수 없는 편지를, 너에게 부치고 싶었어.

편지가 너에게 진실을 말할 것인지, 거짓 편에서 속삭일 것인지 따위는 아무 상관없어. 진실과 거짓이 서로 물어뜯는 모순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진실 또는 거짓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것. 그러한 모순과 갈등들이 어쩔 수 없이 가리키는 지점이 있어. 그것들이 어디에서 피어나서, 어린 나의 마음을 찢고 헐뜯으며 서로 싸우다가, 마지막으로 누구를 향하여 야수의 눈으로 으르렁거릴 것인가를, 내가 쓴 편지는 네게 알려주리라고 생각했어. 편지는 진실과 거짓을 넘어선 모순에 찬 다른 진실을 가르키고 있을 것이고, 그 슬픈 진실을 너는 분명 알아차릴 것이라 믿었어. 네가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편지가 간직한 모순된 비밀을 나는 깨달을 수 있었을꺼야. 하지만…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나는 긴 여름과 가을을 허무하게 보내 버린거야. 이제 편지에 기록되어야 했었던 모든 에너지들이 내 살과 심장을 파고 들며 수치와 후회, 미움과 자신에 대한 저주와 같은 것들을 불러 일으키고, 나를 무너뜨릴 것이야.

미구에 나에게 닥쳐올 환란을 무릎써 가면서도, 편지를 쓰지 않았던 것은, 편지 끝에 마주할 지도 모르는 마지막 진실 때문이었어. 나의 가슴 속에 펄펄 끓고 있는 온갖 모순과 혼돈은, 단 한번 만 너를 꼭 껴안아도, 치유되고 고요해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 그렇지만 너는 아득하게 멀었어, 우리 동네를 적시던 노을처럼. 다가가면 갈수록, 너를 안기에는 세상이, 영원처럼 펼쳐질 앞 날들이, 무서웠고, 사랑한다는 진실을 말하기에는 내가 가진 영혼은 거짓으로 초라했어. 다가갈 수 없었던 어느 날, 문득 나를 보고 있는 너를 보았어. 안타까움과 근심으로 가득한 눈이었어. 더욱 처참했던 것은 가을이 가기 전에, 안타까움이나 근심마저 사위고, 너의 눈빛은 메마른 감정으로 텅비어 버렸다는 거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란, 네 가슴 속에는 나에 대한 어떠한 사랑의 증거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 둘 사이는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어. 그것을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우리의 삭막한 관계를 허울로 가렸어. 그리고 허울 위에 내가 꿈꾸던 ‘사랑’이라는 것을 그려놓았던 거야.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실재한다고 나는 믿을 수 밖에 없었어.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모순과 혼돈 속에 드러난,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는 실체라는 것이, 결국 허울 위에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것일 뿐이며, 허울을 벗겨내면, 그 뒤에 있는 너는 텅비어 버려, 노을처럼 아득하리라는 거야.

나의 사랑이란 허울에 불과한 탓에, 젊은 날에 쏟아져 나온 나의 욕망들은 대상을 찾지 못했고, 헛물만 켜다가 기갈이 들었지. 게다가 갈 곳이 없어서 들에서 무작정 떠돌고 있었어. 어쩔 수 없이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거짓 이정표를 세웠고, 이 터무니없는 사랑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이것이, 지난 여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너를 가슴에 담아, 번뇌를 키우고, 심장에 빗살무늬를 아로새겼던, 그 간의 전말이자, 마지막 진실이야.

이 모든 잘못은 내가 스스로 뒤집어 쓴 허물이겠지만, 더 가혹한 형벌은, 너에게 상처를 주고, 막 피어난 젊음으로 너에게 다가와 찬란해야만 했던 어느 여름과 가을을 그만 먼지와 그늘로 뒤덮어 버렸다는 것이야.

이런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어?

비록 용서해 준다 할지라도, 내가 저지른 ‘죄의 전말’을 가슴 속의 내륙에 가혹하게 새겨놓을 수 밖에 없을거야.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처절한 신음을 지르며 가슴을 뽀개고 녹슨 나의 ‘죄’를 펼쳐 볼 날이 있을꺼야. 아니면 세상이 어린 자신에게 선고했던 가혹한 죄의 삯을 치루기 위하여, 살아갈 이유라곤 씻고 볼 수 없는 세상을, 이를 악물고, 살아가게 될거야.

하지만 형벌을 치르기 전에 한번 만이라도 네 손을 잡고, 마음을 기울여 말하고 싶어.

미안하다고.


강물에 식어 차디찬 돌을 집었다. 눈으로 보고 만지고 그 느낌이 자신의 가슴에 뻐근하게 차오를 때까지,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 가혹하기만 한 세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라도 하겠다는 결심처럼, 돌을 꽉 쥐었다.

차디찬 돌이 자신의 온기로 따스해질 동안 돌을 쥔 채, 안개 속에 그대로 있었다.

비는 그쳤다. 젖은 섬이 밤새 머금은 비를 토해내는 개울소리가 차갑게 들렸다. 식은 강에서는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았다. 뭉쳐있던 안개는 강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산개하며 자욱하게 펼쳐졌다. 섬 건너편의 가로등 불빛이 섬의 내륙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풍경들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돌아가 친구들의 체온에 몸을 비비고 자야 할 것 같았다. 길었던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경춘선에서 내린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배를 타고 웃음지으며, 그가 있는 섬으로 건너올 것이다.

돌아서는 강변 언덕 위에 자신처럼 추위 때문에 방갈로를 벗어난 친구가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않고 친구의 옆을 지나 젖은 낙엽이 가득한 섬의 뜰로 내려섰다.

“이제 돌아가 자려고?”

친구의 말에 입에 울음이라도 물고 있었던 것처럼 간신히 대답했다.

“응!”

그 때 섬의 저 편에서 추위에서 깨어난 새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끄와악~

 

어느 전설같았던 11월의 새벽을 위하여…

20100225

This Post Has 7 Comments

  1. 旅인

    예전 글입니다. 다시 손을 보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슈풍크

    이 글이.. 하나의 길고긴 그 이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에 남는 부분이 참 많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1. 旅인

      이렇게 방문해주시고 답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슈풍크님과는 이웃분들의 마당에서 스쳐지나며 면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슈풍크님의 글에서 나는 향기는 특별합니다.

  3. 마가진

    남이섬에서의 감상을 적으신 것인가요?

    사실, 남이섬엔 가보지 못했지만 여인님의 글을 읽고 나니 더욱 가기가 망설여 집니다.
    여인님께서 그려주신 ‘오후의 미광’ ‘낙엽’ ‘비’ ‘한기’ ‘화톳불’ ‘안개’ 등 이러한 것들이 그려내는 남이섬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면 너무나 실망할 것 같아서요. ^^;

    예전의 기억을 글로써 세밀히 쫒으신 것 같습니다.

    1. 旅인

      이 글은 1977년 11월 어느 날의 남이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만 해도 섬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밤을 지내는 사람 또한 많지 않았습니다. 오후 네다섯시만 되어도 섬은 텅비었고 낙엽이 섬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 후 1997년 9월말에 다시 갔을 때의 남이섬은 더욱 퇴락하고 방갈로와 같은 것들은 삭아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겨울연가 이후의 남이섬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4. 토종감자

    우와. 태그에 남이섬이라고 안써 주셨으면 대체 어느 섬을 이야기 하는지 전혀 모를 것 같네요.
    정말 제가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남이섬을 이야기 해 주시고 계시네요. 위에 보니까 1977년이라고 하셨는데, 상상이 가지 않는 남이섬의 모습이예요. 제가 처음 갔을 땐 1998년이었고, 이번에 글 쓴건 작년인데, 또 98년과도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거든요. 98년의 모습은 ‘전혀’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써도 될 만큼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섬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정통(?) 관광 유원지였죠.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그득한~ 겨울연가를 저는 보진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문화마케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네요. 웨딩촬영하는 중국인들이 꽤 있었거든요. 아니 세상에 웨딩촬영하러 남이섬까지 온답니까…겨울연가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 가끔 너무 많은 수의 그들이 몰려와서 불편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를 그렇게 좋아해주니 고맙기도 합니다. ^^

    1. 旅인

      1977년과 1996년 두번 남이섬에 갔을 겁니다. 77년의 남이섬은 사람들이 와서 놀거나 하룻밤을 보내고 가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1996년의 남이섬의 모습은 흉가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방갈로와 숙소들이 무너져 내리고 섬은 가꾸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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