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씨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다. 영어나 제 삼국의 언어권의 사람들이 자국어로 번역된 이 책을 읽고 열광했다는 것이 놀라왔다. 신경숙 씨의 글도 김훈 씨의 글처럼 다른 나라의 말로 번역한다는 작업이 몹시 어려운,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라, 우리말에 고유하게 특화된 우리 글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엄마를 부탁해’라는 이 소설의 ‘엄마’는 식민지 생활과 한국전쟁 후, 최극빈국에서 OECD에 가입하기 까지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밑바탕에 있었던 우리나라 ‘엄마’의 거룩하고 원초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아마 외국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있을 것 같지도 말도 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놀랍게도 신경숙 씨의 소설 속에서 뚜렷하게 발견한 탓 아닐까 싶다. 거룩한 엄마의 모습을 나도 그의 소설 속에서 찾았다.

이렇게 놀라운 엄마는 때때로 너무 순종적이라는 이유로, 당신의 희생이 자신에게 질곡이 되었다는 변명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늘 희생했기에 늘 그래야 한다고, 무시되거나 아니면 잊혀지고 결국 버려진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엄마를 잃어버린 것으로 하기로 한다.

‘엄마’의 부존재로 부터 가족들은 자신들의 옆에 있었던 ‘엄마’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엄마의 탐구 방식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영화 라쇼몽의 원작)에서 사무라이의 죽음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큰 딸, 큰 오빠, 아버지, 그리고 떠도는 엄마의 혼, 모두가 떠올리는 ‘엄마’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찾는다.

늘 밭에 나가 있거나, 부엌에서 밥을 짖기 위해 달그락거리던, 글조차 모르던 무지랭이 엄마야말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에서 죽은 아들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는 성모의 거룩함과 합치한다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서 장미나무로 만든 묵주를 들고 피에타상 아래 무릎을 꿇은 큰 딸은 마침내 깨닫게 된다.

This Post Has 5 Comments

  1. 후박나무

    대학시절 과제 한다고 읽다가 울었던 기억이 있네요.ㅠ
    소설은 잘 읽지 않게 되는데,
    신경숙님의 [엄마를 부탁해]와 [리진]은 몰입하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1. 旅인

      신경숙 씨의 글쓰기가 너무 절제되어 있는 탓에 저는 감정을 풀고 울진 못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글입니다. 저번에 열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었을 때, 글을 잘 쓰는데 참 작위적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이번에는 뿌듯하게 읽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한강, 공지영, 신경숙 씨 등의 여류작가의 글이 정말 좋습니다.

      저는 예전에 최인호 씨의 ‘별들의 고향’에서 경아가 거울에 루즈로 “아저씨 안녕”이라고 써 논 구절을 보고 그만 눈물을 흘릴 뻔 했던 적이 있지요. 그때에는 감각주의 작가라고 할 정도였는데…

  2. 리얼리티

    엄마로서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난 소감은
    엄마들이 울름문자를 쓰는데서 이제는 힘 좀 내서 보여질 수 있는 소통의 문자를
    써야 한다는 각성이었어요.
    작가가 보여주는 현실을 감상에, 미안함에 마음 조리기 보다는
    이런 엄마가 다가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면
    우리가 어릴때, 걸음마 배울때 아무조건 없이 함께 기뻤던 그 때로 돌아 갈 수 있지
    않을까…기억은 후회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을 찾기 위해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었던 기억이 나네요.

    1. 旅인

      신경숙씨의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저에 대한 참회와 같은 심정도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 식모라고 부르던 누나들에 대하여 못된 짓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참회와 같은 것들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 누나들이 싫었다기 보다 가난하게 때문에 슬프고 외로우며, 배울 수 없다는 것이 불쌍했기 때문에 괜히 그 누나들에게 심술을 부리곤 했었던 것 같다는… 하지만 왜 누나나 형보다는 그 누나들은 저를 좋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봇짐을 지고 서울가는 완행열차표만 달랑들고 신작로를 걸어오는 그 누나들의 모습이 제 머리 속에 노랗게 그려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3. 리얼리티

    다중인격이란 여러 마음을 헤아리려는 나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불쌍해서 안쓰러우면서도 화가나는 것은 자신의 모습들에 안주하려는 그들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젔던건 아닐까요?
    보여지는 나와 보여지지않는 나까지 볼 수 있는 마음은 다른이들을 보는 시선도
    남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느껴지는 마음을 느껴지는대로 느끼기만 한다고 해서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느끼고 있으면 언젠가 기회가 될때 그 느낌에 준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네요…
    나의 따뜻한 마음이 내가 가진 천성임을 안다면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는
    마음이에요. 울름문자가 끌리는 이유도 그래서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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