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읽어야 할 책 – 분노하라

지금 당장에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그것은 ‘분노하라’라는 제목의 책이다.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가이자 세계인권선언문을 초안한 93살의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이 불란서 사회를 향하여 외친 공개유언이다.

한국에서 초판이 발행된 2011년 6월이라면 이명박의 집권 4년차며, 국민의 피로 이룩한 민주주의가 불과 4년만에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고, 자유라는 함의가 이른바 보편적 자유의 의미가 아니라 자유경쟁시장의 의미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위정자를 향해 소리높혀 외쳐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박근혜 정부가 탄생한다. 이 정부가 탄생한 후, 내가 느끼는 감정이란 후안무치, 적반하장, 개념상실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쓰는 언어와 낱말들이 이토록 타락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라의 말(語)이 이토록 타락했는데, 나라가 온전하겠는가?

우리는 해방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분노해야 할 일을 덮어버렸고, 5·16 군사정변과 유신이 만들어냈던 사악한 일들을 또 다른 군사정권 아래서 유야무야돼야 했다. 그리고 5·18 광주민주항쟁 때 학살의 주범을 그냥 풀어주어야만 했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분노하기보다 타율적으로 용서하기에 급급했던 탓에, 오랜 시간과 많은 피를 흘려가며 민주주의를 쟁취한 반면, 쟁취한 것을 그만 쉽게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이 나라에서는 절대적 가치가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버리고, 결국 애국이니 진리니 정의가 밥이 되니? 돈이 되니? 결국 돈과 주먹이야말로 진리고 정의가 되고, 공권력이 돈과 기득권을 보호하는 장치로써 존재하는 것이 나라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이다”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이다.

이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육성에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절대적인 가치가 침해될 때 분노하라. 그리고 인권과 민주주의, 사회보장 등의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의 평결이 재판부에 의해 부인되고, 상사의 외압에 대항하여 직무에 충실했던 윤석열 검사가 대검 감찰에 의해 징계안이 법무부 황교안에게 회부되는 날들 중에 이 책을 읽는다. 스테판 에셀이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70년 전에 구축한 개혁안을 돌아보듯, 우리도 해방 전인 1941.11.28일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건국강령‘을 돌아보아야 하는 지도 모른다.

This Post Has 6 Comments

  1. 정말 와닿는 글입니다.
    누군가 그랬어요…. 이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가 누군가에겐 분에 넘친것이라고.
    그 분에 넘친 사람이 되지 않으려 나름(?) 노력하고 있지만…

    요즘엔 점점 무뎌지는거 같습니다. 아니, 포기한다는게 맞을까요…..
    부동의 51.6% 여기 대구는 더욱 심하구요.

    얼마전 태어난 제 딸래미가 지낼 미래는 이러지 않았으면 해서 관심을 끊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제 딸래미가 커서 개념이 잡힐때 쯤이면.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행하게 되는 그런 나라. 가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연설도 들어봤는데, 자기가 몇일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채
    연설을 하는 그 사람이 정말 대통령이 맞나 싶더라구요.
    답답합니다.

    이런 날에,,,,
    북마크 해놓은 사이트 돌아다니다
    좋은 글을 옳은 생각을 보게 되어 반가워 글을 남겨보아요.

    저도 분노하라 라는 책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1. 旅인

      ‘화’를 내는 것이 힐링의 적이 되는 이 시절에 ‘분노하라’는 제목으로 다가온 본문 40쪽에 불과한 책이 이런 힘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아마 스테판 에셀이 이렇게 소리칠 수 있음은 레지스탕스 전선을 구축하고 2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과 나치에 부역한 자들에 대한 반민특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과 1968년 혁명을 전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감내하고 용인함으로써 불란서가 유럽에서 정신적인 중심 국가에 올라서게 되었다는 자부심 등으로 선생으로써 후생인 젊은이들에게 ‘분노하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우리들 앞에 태어난 자들이 정작 해놓은 것이라곤 없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후퇴하게 한 짓 밖에 없으니 썩은 세상을 후배들에게 남겨놓고 기껏 할 말이라곤 “요령껏 살라”는 정도가 아닐까요?

      따님이 커서 철이 들고 사회에 나갈 때 즈음에는 조금이나마 나아진 세상이 되도록 투표 한표, 신문기사 하나 관심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멀리에서 와 주셔서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2. 후박나무

    얇은 책이지만,
    깊고 무게감 있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책 같기도 하구요.

    1. 旅인

      김구, 여운형, 조소앙, 장준하, 이시영 … 이런 분들이 천수를 누리고 좋게 된 나라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리고 자신들이 이루기 위하여 저항했던 날들을 기억하며 나태하고 게을르며 의롭지 못한 젊은이들을 위하여 이 분처럼 ‘저항하라’고 사자후를 터트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참 부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3. 파워팬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분노하라는 책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글을 쓴 고대생 이야기가 요새 회자되고있던데 그 글을읽고
    안녕하지 못하면서 안녕한척 비겁하게 살아온게 저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분노해야할때 분노하지 않고 침묵으로 버티기가 더이상은 힘들것 같습니다.
    꼭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1. 旅인

      저도 덕분에 ‘안녕들 하십니까’를 읽어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심과 분노 이전에 안녕의 조건과 분노의 조건으로 상식과 정의가 있으며, 그것을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그리도 무사태평하신지 모르겠다는 이 의문문은 분노하라는 선동의 전 단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겁이라는 단어는 그 안에 내가 지금 안녕치 못하다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을 내포한 단어입니다. 비겁하지 않다면 자신에 대한 아무런 반성적 테제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겁하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시대를 직시한다는 반증입니다.
      제 글을 읽어주신 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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