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의 생각

01. 일반버스, 농어촌버스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했다. 길에 흘리는 것이 시간이다. 자가용으로는 한두시간이면 가 닿을 곳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기다리거나 갈아타기 위하여 반나절을 보낸다. 때론 잘못 생각하여 지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간 후, 다시 떠나왔던 곳을 스쳐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날이 지나가자 기다리는 조급함은 사라지고 길에서 날려버린 시간이 아깝지 않다.

02. 고창 선운사에서 2박, 지리산 쌍계사에서 3박을 했다. 휴식형 템플스테이가 좋다. 공양(밥) 때 기다리고 조석으로 예불이나 올릴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하루는 금방 간다. 산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하기조차 귀찮다.

송나라 때 야부 도천 스님은 “밥이 오면 밥 먹고, 잠 오면 잠잔다.”(飯來開口 睡來合眼)고 했지만, 산사에선 바빠서 그것 이상 더할 수도 더할 일도 없다.

03. 전주에서 부안을 거쳐 격포로 가는 길, 몇 사람만 탄 텅빈 버스를 몰던 운전기사는 정규노선인 해안도로가 막힐지 모른다며, 내변산을 가로질렀다. 반도의 내륙은 산도 높았고 거친 암벽들의 풍광이 보통이 아니다. 변산은 508m, 내변산은 459m다.

04. 격포에서 낡은 건물의 옥상에 지어논 사람 키보다 작은 삼각형의 방가로를 본 순간, 해수욕장의 여름이라는 지겹고 지루한 의미를 낱낱히 알 수 있었다.

05. 격포에서 떠난 버스는 줄포 쪽이 아니라 부안으로 다시 간 후, 함초가 자주빛으로 피어난 새만금의 들을 지나, 고부, 백산, 황토현 등 동학농민운동(왜 동학혁명이라는 명칭이 바뀌었을까?)으로 유명한 배들평야를 지나 정읍에 다다른다.

06. 선운사는 정말로 절이다.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선운사에서는 동백꽃이나 상사화 아니면 육자배기나 노래할 수 밖에 없다.

07. 만원을 아끼기 위하여 택한 남원의 모텔은 끔찍했다. 남원하면 모텔이 생각날 것이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될 것이다.

08.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혹은 멀리 백두산에서 흘러왔다고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지리산이 아닌 삼신산 쌍계사에 올라갔으니 지혜로움을 놓쳤는지 모르겠다.

09. 쌍계사는 총림(叢林)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영축총림(통도사), 가야총림(해인사), 조계총림(송광사), 덕숭총림(수덕사), 고불총림(백양사), 5대총림이었으나, 작년에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가 총림으로 승격되어 팔대총림이 되었다고 한다.

10. 쌍계사의 계곡에 앉아 개울이 흐르는 모습을 보면, 가장 아름답고 착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한 노자가 보았던 물은 어떤 물이었을까? 가는 것이 이와 같다(逝者如斯)던 공자가 바라보았던 그 물은 또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계곡물은 저렇게 맑은데도 쉬지 않고 낮은 곳을 향하여 하염없이 달려가는데, 그 흐름 속에 아상(我相)이 없다. 맑아서 개울의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고 허공 중의 빛을 다 비추인다니…

11. 산 중에는 할 일도 많다. 공양시간 맞추느라 바쁘고, 예불 또한 큰 일이라… 산 중이지만 산은 까마득하고, 개울은 돌돌돌 흐르는데 개울가에 앉아 가을하늘 한번 쳐다보기도 큰 힘이 든다.

12. 쌍계사 금당에서 육조를 생각한다. 돈오(頓悟)가 맞는다 하여도 실상은 점수(漸修)가 필요한 것이 중생이고 이 세상이다. 혜능화상이야 배우지 않고도 아는(生而知之) 사람이라면, 신수화상은 배우고 닦아야 하는(學而知之) 사람이고, 나와 같은 중생들이야 몸을 고달프게 하여도 알뚱 말뚱한(困而知之) 자들 아닌가?

중생이 그러한 데, 돈오는 무슨? 점수조차 가당치 않을 것을…

13. 전라선의 역이 있는 구례구는 다리 건너편의 구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승주에 속한다. 그래서 구례가 아니고 구례구인 것이다.

14. 동익산과 익산의 역 사이에 모텔이 운집해 있는 곳이 있다. 거기에 ‘아담의 성’이라는 모텔이 있고, 그 옆에 ‘이브의 그 곳’이라는 모텔이 있다. 어느 모텔이 먼저 생겼을까?

15. 열차가 용산역에 도착하자, 또 어느 곳인가로 떠나가야 할 것임을 직감했다.

This Post Has 6 Comments

  1. 후박나무

    도심의 생활에 휩쓸려 살다 보니 제 마음속에도 조급함이 자리 잡고 있네요.
    급한 마음을 다스리고 난 후 만나게 된 풍경들… 멋질 것 같습니다.^^

    선운사~ 혼자서 조용히 한 번 들러보고 싶은 곳입니다. :~)

    저도 돈오보다는 점수가…ㅎ

    1. 旅인

      저도 처음에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괜히 핸드폰을 들여다 본다거나 공책에 뭘 적는다거나 분주하더니 먼지가 가라앉듯 조금은 한가해지더군요.

      선운사는 산곡 사이의 평지에 세워진 정말 평범한 절로 한 때 수도하는 승려가 삼백에 달했다고 합니다. 가파른 계곡에 놓인 쌍계사와 달리 차분한 정취를 느낄 수 있고 조만간 단풍이 멋지게 물들 것 같습니다.

      고향 질마재가 선운사와 가까운 서정주씨가 선운사와 관련된 시를 쓰다보니 선운사와 관련된 시가 풍부한 것 같습니다.

      템플스테이 방 옆 서가에 선운사 관련 시집이 있어서 보니 김용택선생의 ‘선운사 동백꽃’이란 시가 보이더군요.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 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 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이 시를 읽으며 김선생이 정말로 혹독하게 헤어진 것처럼 느꼈습니다. 제가 머물던 거처가 김선생이 엉엉 울었던 그 뒤안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2. 흰돌고래

    여인님 참 멋진 여행 하셨어요:-)
    글귀를 하나 하나 보다가, 10번 글은 특히 더 오래 바라보게 되어요.

    1. 旅인

      꽤 긴 여행을 혼자 했는데, 그냥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가을이 오기 시작하는 산사의 계곡물은 참으로 맑아서 저런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3. blueprint

    문득 시인을 엉엉 울게 만든 선운사의 동백꽃이 보고 싶어집니다.
    좀 기다려야겠죠.

    전 오랜 미국생활을 접고 귀국했어요.
    아직은 적응하느라 힘들고 또 너무나 많은 근무시간에 아무런 여유도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더 늦기전에 단풍으로 물든 산사를 다녀오고 싶은데 말입니다.

    지혜로움을 놓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생각들을 많이 하고 오셨으리라…

    역시 저는 차단되었다고 그러네요.
    어쩔수 없이 비밀글로. ^^;;

    1. 旅인

      영어환자라는 외국스팸메일을 막기 위한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탓에 그런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취직하신 모양이네요. 넓고 여유로운 곳에서 지내시다가 좁고 팍팍한 서울생활에 다시 적응하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저는 이번 달로 근무를 마치게 되어 11월에 산사를 다시 한번 다녀올 계획입니다. 지혜의 한자락을 얻어올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참! 선운사의 동백은 추백도 동백도 아니라 3~4월에 피는 춘백인 관계로 미당이 “선운사 동구’에서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라고 노래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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