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에서

금당과 그 안의 육조정상탑

금당의 육조정상탑 안에는 육조 혜능(六祖 慧能)대사의 두개골이 들어있다고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종헌(宗憲)에는 “본 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조계종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까닭은 금강경이 존재의 실상인 공(空)에 대한 가르침으로 6조 조계혜능 선사께서 항상 곁에 두고 읽으셨으며, 제자들에게도 금강경을 널리 의지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한불교조계종은 설명한다. 그만큼 육조 혜능의 위치란 우리 불교에 있어서 어마어마하다. 금당의 한쪽 기둥에 보이는 주련에는 돈오와 점수로 대표되는 중국의 남종선과 북종선을 가르는 육조단경의 핵심이 담겨 있다.

앞 네개의 기둥에 달려 있는 주련에는 다음 게송이 쓰여 있다.

菩提本無樹    보리(깨달음)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無臺    맑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本來無一物    본래 아무 것도 없는데
何處惹塵埃    어디에 티끌이 앉으랴

육조 혜능께 부치는 잡소리…

육조 혜능은 출가하기 이전에 누군가가 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나무를 해다 장터에 팔아 조석을 마련하기를 때려치우고, 오조 홍인화상 아래로 출가한다. 이미 득도를 했으나 완전 무식하고 못생기고 오랑캐인 관계 상 절깐 마당이나 쓸고 있을 때, 홍인화상이 제자들에게 게송을 지어보라는 지시에 따라 상좌 신수가 벽에 써 놓은 게송,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遺有塵埃”(이 몸이 보리수요, 마음이 명경대라.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을 보게 된다.

다른 중들은 신수에 대적이 안된다며 게송 짓기를 포기했으나, 혜능은 신수의 게송이 별 볼일 없다고 판단, 다른 중에게 위의 게송을 벽에 대필해달라고 부탁한다.

혜능의 위의 게송의 논지를 보자면, 신수가 열심히 수행을 해서 티끌이 끼지 않게 한다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점수(漸修)를 노래한다면, 혜능은 본래 닦을 몸과 마음이 없는데 어디를 갈고 닦을 것이며, 어디에 티끌(무지와 번뇌)이 앉을 것이냐고 돈오(頓悟)의 경지를 직접 표현한다.

혜능의 게송을 읽은 오조 홍인은 혜능을 몰래 불러 의발을 전수하고 신수 등의 해꼬지가 있을까 염려하여 남쪽으로 튀라고 한다. 남으로 간 혜능의 선종을 남종선이라고 하고, 돈오(단박에 깨달음)를 추구한다고 하며, 반면 신수의 선종을 북종선이라고 하고 점수(수행을 통한 점진적인 깨달음)를 추구한다고 한다.

그 후 북종선은 명맥이 쇠미해지고 혜능의 제자들이 크게 융성하여 남종선은 5가7종(五家七宗)으로 분가한다. 그 중 가장 발달한 것이 임제종으로 임제 밑의 대혜 종고에 이르러 화두를 이용한 간화선으로 발전한다.

신라말에 구산선문을 연 유학승들은 대개 육조의 증손계인 9조대에서 선을 배워와 산문을 연 탓에 10조대 정도의 배분이 된다. 임제종의 임제 의현은 11대이며, 간화선을 만든 대혜 종고는 12세기 송나라 사람으로 한참 뒤의 사람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은 고려 때나 수입된다.

육조 혜능의 출현은 禪 불교에 있어서 대단한 의미가 있다. 혜능이 무식할 뿐 아니라, 오랑캐이며, 열심히 참구하지 않았어도 문득 깨달았다는 점은 신분이나 종족, 가방끈에 차별이 없다는 불교의 평등함을 선양하고 참구나 수행보다 발심하여 깨달음을 얻고 해탈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이는 敎(부처님의 가르침)보다 禪(참선) 중심으로 불교의 흐름을 바꾸고, 깨달음이 수행에 입각하기 보다 로또 당첨처럼 문득 오는 것처럼 요행을 부추긴다. 이런 선 불교의 타락에 조선의 억불정책이 올라타면서, 조선의 불교는 경/론/율 삼장을 이론화할 지성을 갖추지 못하고, 이러한 이론적 취약성 탓에 禪 또한 발전하지 못한 관계로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런 탓에 추사가 당시의 중들에게 “X도 모르는 것들이 지랄”이라며,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백파선사에게 종주먹을 드리 댈 정도였으며, 해방 후에도 보조국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하여 돈오점수를 주장한다면 육조 혜능의 법맥이 아니라며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사람이 종정이 되어 山是山 水是水 佛在甚麽處라는 죽은 화두나 날리곤 한다.

돈수(단박에 수행함)가 가능한 것일까? 이런 혼란이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혜능대사로 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른지?

금당이라는 중앙 현판 옆으로 ‘육조정상탑’과 ‘세과일화조종육엽’이라는 현판은 추사의 글씨다. 하지만 모각의 질이 나빠 추사의 골기나 서권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제대로 된 현판은 팔영루 옆에 있는 ‘성보박물관’ 내에 보관되어 있다. 금당 내에 육조정상탑은 두개골 이야기가 아니라면 볼 것조차 없는 돌더미일 뿐이다.

圓 中 花 笑 聲 未 聽
林 中 鳥 涕 淚 難 觀
竹 影 掃 階 塵 不 動
月 穿 潭 底 水 無 痕

冶父 道川

뜨란의 꽃이 웃지만 웃음소리 들리지 않고,
숲 속에서 새가 울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는구나
대 그림자 계단을 쓸어도 먼지는 그대로,
달빛이 못 바닥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조차 없으니

20130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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