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선운사에서, 최영미의 詩…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추사의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비’

이 부도비에는 추사와 백파선사의 질긴 인연이 배어있다. 선사의 부도는 말년을 보냈던 내장산 구암사 초입에 있다고 한다. 선운사에는 부도없이 비만 있다. 요즘의 염치없이 큰 부도비에 비하여 작은 이 비에 새겨진 글씨는 추사의 나이 70에 쓴 만년의 글로, 그의 필생의 내력이 묻어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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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선사는 임제종의 조사선 우위를 주장하며, 마음의 청정함(大機)과 마음의 광명(大用)이 함께 베풀어져야 세상의 실상과 허상,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함께 작용하는 살활자재(殺活自在)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추사의 친구인 초의선사는 교(敎)와 선(禪)은 다른 것이 아니라며 “깨달으면 교가 선이 되고, 미혹하면 선이 교가 된다”며 백파와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인다.

이에 불교에 자못 일가견이 있다는 추사가 논쟁에 가세하여 백파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하는 서신들을 보낸다. 이 서신의 글이 ‘백파 망증 15조'(白坡妄證15條)이다.

서신에서 추사는 조선 선문(禪門)의 무식함을 질타하며, 백파가 함부로 정자, 주자, 퇴계, 율곡 등을 성리학의 거두들을 거론하는데 웃기지 말라. 또 낫놓고 기억자 조차 모르는 육조(혜능)의 구결을 닥치는대로 망증하여 혜능을 유식한 육조로 만들었다고 백파에게 가혹한 힐난을 한다.

하지만 제주의 귀향살이에서 해배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교만했음을 후회한 추사는 백파선사에게 사과코자, 서신을 보내 정읍에서 장날에 만나자고 한다. 가는 길에 눈을 만난 추사는 그만 늦고 만다. 이틀이나 걸리는 구암사까지 가서 사과하기에는 고향길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서로 만나보지 못한 채, 추사가 북청 유배 중에 백파선사는 입적하고 만다.

완당의 나이 70이 되던 해(백파가 입적한 지 3년 되던 해)에 백파의 제자인 설두와 백암이 과천의 초당에 찾아와 백파의 비문을 지어달라고 청한다.

추사는 비알에 행서로 “(…) 대기와 대용이 바로 백파스님이 팔십 년 동안 늘 강조한 사항이다. (중략) 그러니 백파의 비면 글자를 지으면서 대기대용, 이 네 글자를 대서 특필하지 않는다면 족히 백파의 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백파를 사모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쓴다.

<유홍준의 학고재 간 완당평전 중에서 관련기사를 축약하여 올림>

서정주는 “귀양살이 길의 추사가 어느 날 석전(石顚)이라는 호를 하나 지어서, 그의 심우인 백파스님에게 보내며…”라며 쓰고 있는데, 위의 유홍준씨의 글로 미루어 보면 심우라고 할 사이는 못된다. 또 백파선사는 추사보다 나이가 22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늘 미안해 하던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를 가면서 석전이라는 호를 보냈을 지도 모른다. 이 석전이라는 호는 백파스님의 일곱대 후의 제자이자 불교의 식민지화에 저항하며 한국불교를 지켜나갔던 박한영 대종사(1870~1948)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201309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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