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극장에서 영화를 놓친 관계로 네이버인가 다음에서 구매하여 보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사의 기나긴 파행은, 이른바 ‘제주 4·3 사건’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주저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와 같은 주저수러움은 ‘6·25 동란’과 ‘한국전쟁’ 사이, 그리고 ‘5·18 사태’와 ‘광주 민주항쟁’ 사이에서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가 하고 묻게 만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 탓이기도 하다.

감자의 제주도 방언이 지슬이라기에는, 지슬은 어감마저 좋고 어여쁘다.

지슬의 영화는 지슬로 버텨나갈 수 있는 불과 한 두 주일 혹은 한 두 달 간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좁은 섬 사람들에게 불어닥친 불행의 폭과 시간은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다. 지슬이 배경으로 하는 시간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처절한 7년 7개월이라는 시간들이 포개지고 포개지는 가운데 위치하기 때문이다.

흑백의 이 영화를 놓고 심사위원 대상을 준 선댄스 영화제의 심사평은 “깊이 있는 서사와 더불어 시적인 이미지까지 지슬은 우리 모두를 강렬하게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이었다”고 말한다. 또 버라이어티는 “숨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오멸 감독은 절망에 맞닥뜨린 인간의 삶을 강렬하게 보여준다”고 한다.

이 흑백영화가 숨막힐 정도로 아름답기에는 PC의 모니터라는 한계는 뚜렷한 것 같다. 그것은 칼라영화보다 더 찬란한 흑백영화 ‘금지된 장난’을 TV 브라운관으로 봤을 때의 실망감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보다 흑백의 음영 속에 떠오르는 인간들의 눈동자들, 인간을 상실한 광기에 찌든 군인들의 눈동자, 검은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얼마나 사악한 시간 속을 자신들이 지나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순박한 눈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순박한 눈동자를 가진 어여쁜 사람들이 사악한 시간을 가까스로 돌파하고 살아남았을 때, 과연? 그 사람들의 눈동자에 순박함은 과연 남아있을 것인가.

21세기 이 땅에 살아 남아있는 한국인들은 과연 어떤 눈동자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묻고 싶은 영화다.

참고> 지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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