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회빈 강씨

어제 집으로 돌아가보니 책(유인물)이 한권 배달되어 왔다. 광명문화원 향토사연구소에서 주관한 해당 지역의 문화인물의 한 사람인 ‘민회빈 강씨’에 대한 지역문화콘텐츠 개발방안에 대한 것이다.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지만, 이 한권의 자료 만을 보아도 연구해야 할 가치는 상당하다고 보여진다.

1. 되놈

되놈은 중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인다. 하지만 ‘되’는 두만강 근처에 살던 미개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여진족을 비하한 말이 되놈이다. 여진족의 만청정부가 중국을 268년간(1644~1912) 지배하면서 ‘되’는 오랑캐 여진족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중국 전체로 부지불식 간에 의미의 내포가 확대 전치되고, 중국인을 ‘되놈’이라고 평가절하하게 된다.

‘되놈’과 ‘왜놈’이라는 실체를 직면하지 못한 싸움에 진 자들의 비겁한 평가절하는, 우습게도 전시에 독자적인 작전권조차 펼칠 수 없다는 우리의 현실과 잇닿아 있다. 되놈과 왜놈들을 우습게 보고 있지만 이들을 경멸할 수 있는 실체적인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냉엄한 현실은 또 다른 숭명반청을 낳는데, “미국에 미운 털 하나락또 백히면 우리는 그냥 간다”며 미 8군이 천년만년 주둔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은 주축국이 명에서 청나라로 파워시프트가 되던 병자호란 당시와 몹시 흡사해 보인다.

2. 북학

정조 2년 박제가는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북경에 사행을 다녀온다. 청나라의 문명을 접한 그는 청의 문물에 대한 기록과 함께 조선의 문제점과 대책 등을 모아 북학의(北學議)를 쓴다. 이 북학의를 바탕으로 후일 농서를 구한다는 정조에게 진북학의소(進北學議疏)를 올린다. 하지만 그는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 조선에서 농사 만으로는 백성이 호구하기란 힘들다며 농사보다는 상업과 교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소(疏)에 피력한다.

북학이라는 단어는 맹자가 문명을 가지고 야만을 개변시킨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야만을 가지고 문명을 개변시킨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대의 선생, 陳良은 남만의 땅인 초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주공과 중니(공자)의 도를 흠모하여 북으로 와서 천하의 중앙인 추로지역에 와서 제대로 배웠다. 1吾聞用夏變夷者, 未聞變於夷者也. 陳良, 楚產也. 悅周公, 仲尼之道, 北學於中國 (맹자 등문공상 : 도올 역)고 남방에서 온 허행의 학술(南學)에 빠진 진량의 제자를 질타하는 구절에서 나온다.

여기에서 북학은 장강 이남의 야만의 나라에서 북쪽의 중국(中國 : Center Countries 즉, 주공이 세우고 공자가 가르친 노나라와 인근제국)의 학문을 배우는 것을 지칭한다.

박제가가 북경에 사행을 다녀온 1778년은 건륭제(1711~ 1799, 제위: 1736~1795)의 치세의 정점이자, 청태조 누르하치, 조선을 쳐들어온 태종 홍타이지, 중국을 무너뜨린 세조 순치, 성조 강희, 세종 옹정을 거쳐 고종 건륭으로 중국 역사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문명이 발달하고 강역을 넓혔을 뿐 아니라,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던 시기이다.

박제가는 출신이 노론이다. 노론은 인조반정을 통하여 광해군과 대북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한 서인의 한 분파다. 이들 서인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무조건 반대하여 친명배금으로 병자호란을 초래했고, 명나라가 무너진 이후 서인의 계파인 노론은 반청숭명의 의식 속에서 청나라를 ‘되놈’이라 하고 과거 금나라의 위세 속에 간당간당했던 남송의 주희의 대금항쟁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성리학을 더욱 숭모하며 예교화하고 주자에게 오류가 있을 수 없다며 신성시한다.

이러한 노론의 일파들이 청나라의 문물을 북학이라 하고 자신들을 북학파라고 칭했다는 것은, 사행가서 본 청나라의 문물이 얼마나 놀라왔던 것인가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하지만 여기의 북학은 맹자가 말한 사문(斯文: 문왕, 주공, 공자로 이어지는 중원의 문화)가 아니라 청나라의 문명이다. 노론의 일파인 북학파의 주장은 상업과 수공업의 장려다. 남인 경세치용학자들이 주장하던 중농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점 또한 유념해야 할 점이다.

북학은 남만이 북쪽 중원의 학문을 배운다는 의미로 끝날 수는 없다. 진정한 북학은 개방적인 마음이다. 중국은 북방과 서방의 유목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문화를 보급한 것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인도, 페르시아, 유럽의 문명과 기술, 그리고 제도 등을 입수했다. 그것 또한 북학이다.

3. 중종, 선조와 인조

여기의 세 임금은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임금이다. 조선의 임금이 되기 위한 정통성은 적장자(왕후의 자식으로 장남)이다. 중종은 신하들의 쿠테타에 의하여 그냥 임금이 되었다. 왕권을 권위를 유지할 수 없던 그는 중종반정의 훈구세력에 빌붙었고, 다음에는 도학정치라며 사림에 빌붙었고, 결국 외척에 빌붙어 왕권을 부지하다 죽는다. 그러다 보니 조광조를 사사하는 것을 목도한 당시 사관은 중종에 대해서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고 한다. 그만큼 줏대가 없었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출신이며, 명종의 이복조카이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불가능의 확율을 뜷고 16세의 나이로 기적적으로 임금이 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지위가 불안했고, 조정의 동인이 무서웠고 서인이 무서웠으며, 정철이 무고한 정여립의 일당을 죽여야 자신이 살 것 같았고, 연전연승의 이순신이 왕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으며, 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었던 똑똑한 아들 광해가 미웠다. 그러면서도 자신처럼 정통성이 없는 왕을 세우기보다 적장자인 5살짜리 영창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전란 후의 피폐해진 조정을 13년간이나 섭정에 맡길 수 없기에 마침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인조는 광해군 때에 역모에 연루되어 동생 능창군이 사사되고, 아버지 능양군이 홧병으로 죽게 되자 쿠테타를 일으킬 것을 결심한다. 광해가 패륜무도하다는 명분으로 쿠테타에 성공한 그는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광해군 당시의 정국 주도세력인 북인들을 대거 숙청하고 즉위 초기의 역모세력이나 이괄의 난에 연루된 인사들을 숙청하는 등 피로써 자리보전하기에 급급했다. 광해군이 어찌되었던지 어머니(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형제인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사사하는 패륜을 저질렀다고 하면서도 그는 복권시킨 인목대비를 구박하였고, 광해군이 후금(청나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국제정세 같은 것은 나 몰라라 돌연 숭명반청 노선으로 돌아선다. 이는 대북정책에서 무조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노선과는 무조건 달리 가야겠다고 했던 MB정권의 행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인조는 피할 수 있었던 병자호란을 불러들였고, 남한산성에 들어간 지 두달 밖에 안된 정축년 1월, 되놈의 신하의 옷인 남복을 하고 하얗게 눈이 쌓인 남한산성의 북문을 걸어내려가(丁丑下城), 삼전도의 수항단 아래에서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청 태종인 홍타이지에게 세번 무릎을 꿇었고, 무릎을 꿇을 때마다 땅바닥에 머리를 세번 쳐박는 오랑캐 신하의 예인 삼궤구고두례를 행한다.

4. 소현세자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봉림대군 내외 및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끌려가 심양관에 억류된다(1637). 심양에서 그들이 본 것은 한낱 변방의 오랑캐들의 문화와 문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만강 가에서 고기나 멧돼지나 잡아 연명을 하던 되놈이 아니라, 만주와 흑룡강 일대의 여진족을 규합하고 고비사막의 몽골족을 흡수하고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바람보다 빠르게 이동한다는 팔기병의 혁신적인 경기갑 체제를 이루는 무기체제, 다양한 문명과 문화를 흡수하여 강대한 제국을 이룩하려던 그들의 개방적인 학문은 자왈하며 사서삼경이요, 성즉리 이발기발의 고리타분한 성리학과는 달랐다.

심양관의 창문을 열고 본 심양의 거리 모습이야말로 앞으로의 세계 대제국으로 욱일승천하고 있는 다이칭구룬(Daicing Gurun, 大淸帝國) 바로 그것이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숭명반청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정책인가를 확인하고, 멧돼지나 잡던 되놈들이 조석지간에 세운 심양 성시가 얼마나 화려하고 번화한가에 다시 놀라고 만다.

아마 구한말 유길준이 개화한 일본을 보고 놀랐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경악을 했던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국제감각이 유별난 것이 아니라, 고생스런 볼모살이를 하면서 느꼈던 쇼킹한 체험이 그에게 국제정치 감각을 배양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은 존명사대라는 죽은 불알을 놓지 못하고, 함께 볼모 생활을 한 동생 봉림대군(효종)은 조선으로 돌아와서 북벌이라는 헛된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소현세자는 도르곤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수도가 되놈들에게 함락되는 세계사적인 경험(1644)을 하고 북경에서 선교사인 아담 샬과 교류를 가졌고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간다면 천주교 전도활동을 적극 돕겠다고 한다.

중원 대륙을 차지한 청은 더 이상 조선이라는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탓인지 다음 해 2월 소현세자는 볼모 생활에서 풀려나 귀국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볼모 생활이야말로 복락이었다. 왕이 되어야 할 일국의 세자의 운명은 귀국과 함께 비극의 나락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만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두달 뒤, 인조의 어의인 이형익의 시침을 받은 지 사흘 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시신의 상태로 볼 때, 독살된 것으로 강력히 추정되는데, 그의 죽음 앞에 인조가 보여준 태도는 죽음을 사사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혐의가 짙다고 한다.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 해, 민회빈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무고를 받고 사약을 받았고 소현세자 아들 셋중 둘은 귀향 중에 장독과 병에 걸려 죽고, 막내 경안군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인조가 자식은 물론 며느리, 손자마저 죽이는 이와 같은 패륜적인 행위를 저지른 이면에는 청의 황제 및 도르곤이 친청파인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하고 대신 자신을 볼모로 데려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했다는 설과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의 모함 탓이라고도 한다. 아마 두려움이라는 불에 모함이라는 기름이 가세하여 아비가 자식, 며느리는 물론 손자까지 죽여버리는 전대미문의 패륜적인 광기에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적장자인 소현세자가 왕이 되는 정통성이 무너짐으로써 겪게 되는 비극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외래문물을 적극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케 하고 오히려 쓸모없는 북벌과 죽은 불알 존명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소중화(小中華)를 이루겠다는 시대 착오를 거듭한다.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소중화 제국을 이루겠다는 집착은 유교의 막장 드라마인 예교주의가 되었고, 결국 인조의 차남인 효종의 죽고 난 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 문제로 급기야 장자의 삼년복이 가하냐 차자 이하인 기년복이 가하냐는 예송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이전의 붕당 간의 대치와는 달리 남인과 노론의 전신인 서인이 서로 죽고 죽이기 식의 당파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정권을 놓치면 죽는다 라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의 정권투쟁이 지속되었고 풍양 조씨, 장동 김씨(도성의 장동에 살던 안동 김씨) 등의 권문세가의 장기농단으로 조선은 물러터지고 삭아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병탄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좀더 일찍 외래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교가 보다 빨리 전교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면, 지금의 개신교와 같은 막장을 맞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5. 민회빈 강씨

소현세자의 아내이자 세자빈인 강씨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여성으로서는 가장 독특한 퍼스날리티를 보여준다. 사임당 신씨가 양처인 것은 모르겠으나 현모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허난설헌이 여필종부라는 우울한 굴레에서 그만 좌절한 여성상을 보이고, 황진희가 찌질한 양반, 먹물들을 비웃는 기생으로 치마자락을 드날리는 모습이라면,

민회빈 강씨는 남편을 보좌하여 장원을 꾸리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무역을 통해서 돈을 벌고, 이 자금으로 조선인 포로 석방 및 대외 로비 활동의 자금으로 활용했으며, 소현세자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경우 남편이 하던 조선의 전권대사 활동을 대리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상황 상 몹시 독특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당시 안방마님이 곳간 열쇠를 들고 집 안의 며느리를 단속하고, 수렴청정하는 대비가 친정의 권력 확보를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모습과 크게 다를 뿐 아니라 활동의 영역이 내 집, 내 식구를 넘어 백성과 나라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 구중궁궐의 여인들이 왕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에 연연할 때,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머나먼 볼모의 땅, 심양에서 한 제국이 무너지고 한 제국이 굴기하는 세계사를 직접 체험했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민회빈 강씨는 조선 시대의 다른 여인들에 비하여 유별난 점이 있다.

인조 때 역모로 무고되어 사사당한 강빈은 숙종 때 신원이 복원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받는다. 그리고 광명에 있는 그녀의 묘소는 민회원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고종 때 영회원으로 개칭된다. 기록에 따르면 이 곳 민회원을 다녀간 왕이 있는데, 정조다. 1797년 정조는 아비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가던 길에 민회원에 들러 민회빈과 그녀의 부친 강석기를 위한 제문을 지었다고 한다.

민회원에 들러 본 후 강빈의 아비 강석기의 제문을 지어올린 정조의 감회는 달랐을 것이다.

정조의 어미는 ‘한중록’을 지은 혜경궁 홍씨다. 혜경궁의 집 안은 빈한했지만 여차저차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사도세자는 조정을 겹겹히 둘러싸고 있는 노론 세력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혜경궁 홍씨의 아비인 홍봉한은 노론이며, 딸과 사위보다는 자신이 얻게 된 지위가 흔들릴까 노심초사했으며, 딸 혜경궁 홍씨, 동생 홍인한 등과 함께 세자에 대한 불리한 정보를 빼내 노론세력들에게 넘김으로써 결국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도록 하는 데, 공을 세운다.

그녀가 쓴 한중록은 궁중의 여자, 즉 왕이 될 뻔하다 뒤주에 일찍 남편을 보낸 비극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쓴 궁중문학이라고 이해되고 있으나, 이 글들은 정조가 살아있을 때에도 몰래 몰래 쓰여졌고, 한중록은 결국 그녀의 손자인 순조를 수신자로 하고 있다. 그 내용은 정순왕후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홍낙임의 신원회복을 탄원하고, 사도세자의 왕위 추숭을 정조가 약속했다는 것과 사도세자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자신이나 아버지 홍봉한이나 숙부 홍인한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해명성의 글이다.

집 안의 안위를 위하여 남편과 사위, 조카사위를 팔아먹은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를 가진 정조가 민회원에서 남편 때문에 죽은 민회빈, 사위 때문에 아들과 딸, 자신 모두 저승으로 가야만 했던 강석기의 제문을 쓰면서 정조가 느꼈던 감회는 어떠했을까?

6. 마지막

광명문화원 향토사연구소의 세미나의 목적은 민회빈이라는 지역 컨텐츠가 될 수 있는 인물의 발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조선은 맹자의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건국된 왕조다. 조선조의 인권은 고려는 물론 주변 나라와 비교할 때 유래가 없을 정도로 백성을 향해 있었다. 사무라이가 길거리의 양인이 건방지게 자신을 꼬놔봤다고 “칙쇼!”라며 일본도로 목을 칠 수 있었다면, 어찌되었건 간에 조선의 사법제도는 곤장을 한대 치더라도 고을의 사또가 그 죄를 물어야 하는 나라였다.

요즘 사극을 보면, 조선의 궁중과 심지어는 향촌에 이르기까지 我 조선은 동방음모지국으로 서로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되며, 모두 중상모략과 음해를 즐겨하는데, 주인공만 옳고 바르게 사는 모습을 비춰준다. 즉 우리의 사극은 우리 역사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사극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만큼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할까 하는 문제가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와 관련한 사극 ‘뿌리깊은 나무’ 또한 단순한 집현전 학사들의 노고와 한글의 반포를 이야기한다면, 기록물 이상의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기 때문에 밀본이라는 조선 왕조의 반정부 세력을 등장시켜 꼬고 또 꼼으로써 드라마의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드라마 중 가장 건전한 드라마는 자본주의 냉혹한 정글 직장 안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계약직과 정규직이라는 평범한 다수의 애환을 그린 ‘직장의 신’이 단연 압권이었지만, 그마저도 원작은 일본 드라마이다.

우리의 사극들의 문제점은 시청율을 올리기 위하여 역사를 함부로 왜곡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가 권력 투쟁이며 긍정적인 면이 부재하다는 식민사관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만 계속 생산해 낸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사극의 컨텐츠를 민회빈 강씨와 같은 새로운 인물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광명문화원 향토사연구소의 입장에 크게 동의한다.

다시 한번 광명문화원 향토사연구소의 노고를 치하하며, 광명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향토의 인물을 발굴하여 흥미로운 소재를 제공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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