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로이드 전쟁

2013년 5월 7일 오늘, 우리나라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은 이렇다.

“‘뉴스쇼 판’ 끝 부분에 ‘거수경례’하는 건…” (조선)
남양유업 회장 “법 지키면 경영 못해” (경향)
‘욕설 우유’ 남양유업은 어떤 회사이길래? (한겨레)
<오마이뉴스>에 기사 올리고 잘렸습니다 (오마이뉴스)
“北 김정은,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한국)
[단독]”유엔이 세운 대학” 사기극…정체는? (동아)
충격적인 사촌누나의 ‘익명 고백’ …고백이 더 충격 (헤럴드경제)
“女 은행원, 학벌 안 보고 고졸로 뽑았더니…” (한경)

헤드라인으로 미루어 볼 때, 남양유업 사건을 빼놓으면 며칠동안 우리나라는 몹시 조용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헤럴드경제의 경우 기사꺼리가 없다보니 온라인 게시판에 익명으로 올린 사실 자체가 확인조차 않된 글을 헤드라인으로 잡고 있다. 카페 게시판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론임을 언론사 스스로가 자인한 셈이다. 국정원 여직원이 집에 틀어박혀 ‘오유’등의 카페에 댓글을 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헤드라인의 말끝을 흐린 문장들은 신문 본연의 ‘보도’보다는 “잘 모르겠지?”, “궁금하지?”라는 삐끼성글이다. 언론은 이제 노랗기는 고사하고 낚시언론으로 전락한 셈이다.

딱 50년전인 1963년 5월 7일의 헤드라인을 보자.

5·16동지회 민간인 포섭에 적극 (동아)
박의장 출마면 재야단일후보 필요 (경향)

1961년 5.16 쿠테타로 중단된 헌정질서를 복구하기 위하여 국가재건최고위원회에서 민정이양을 하고, 이양 후 10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5·16동지회(공화당의 전신)와 민주당 등 야당의 입장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헤드라인 만 보아도 보도내용의 대강이 잡힌다.

오늘의 헤드라인은 언론도 벌어먹고 살아야 하며,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뒤쳐지고, 발행부수가 줄어들면서 광고주들의 눈 밖에 나고 결국 적자에 시달리다 신문사의 문을 닫고 만다는 피 튀기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논리에 입각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한겨레’나 ‘경향’, ‘오마이뉴스’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단지 시장이 진보적인 독자층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진실이나 정의보다는 당일의 신문부수를 올릴 짜릿한 기사가 필요하다. 짜릿한 기사가 늘 풍성한 것이 아니기에 반쯤 벗은 연예인의 사진과 남은 지면을 채워 줄 박스기사가 필요하며, 남는 지면은 광고로 빽빽하게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원제는 ‘세기의 살인'(THE MURDER OF THE CENTURY)이지만 ‘타블로이드 전쟁’이 훨씬 잘어울린다. 이 살인사건의 보도 경쟁에서 <뉴욕 월드>을 따돌리고 <뉴욕 저널>이 선두로 어떻게 올라설 수 있는가를, 이스트 강에서 토막난 사체가 끌어올려진 1897년 6월 26일 부터, 살인자로 추정되는 마틴 손이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당하는 1898년 8월 1일까지, 밀도깊게 보도하고 있다. 그 이후 공범인 낵 부인이 출감을 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경찰, 신문사 기자, 사주들에 대해서 에필로그 형태로 기술하고 있기는 하다.

백여년 전에 벌어진 이 사건과 관련된 수사, 공판과정에 대한 보도에 있어서 콜린스는 이천오백년전 춘추의 기자였던 공자의 방식을 따른다. 공자가 “기술하되 짓지는 않는다”(述而不作)고 했듯이, 콜린스는 책의 7쪽에 「…인용부호 안의 대화는 모두 이들 기록에 나와 있는 그대로이고, 장황한 부분을 생략하기는 했지만 내가 덧붙인 단어는 하나도 없음을 일러둔다」고 한다.

이 책은 픽션이 아니라, 백여년 전에 벌어진 사건들(Facts)에 대한 ‘보도’다. 세기를 격하고 있지만 콜린스의 보도는 세기말의 소란과 뉴욕의 시끌벅적함을 3층 건물 창 밖으로 내려다보듯 리얼하고 선명하다. 시체공시소의 포르말린과 방부제 속에서 은밀하게 시신들이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거나, 당시에는 변두리였을 우드사이드, 브롱크스의 숲과 개활지의 황량함을 보여주거나,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터가 되어버린 낵 부인의 아파트와 주변거리, 그리고 사람들의 열기 속에 증거로 제시된 사체가 썩어가는 냄새가 비벼지고 각종 추문과 엽기적인 추리들이 난무하는 제퍼슨마켓 법정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콜린스는 이런 뉴욕의 풍경 위에 사건을 나열함으로써 <뉴욕 저널>이 수위를 달리던 <뉴욕 월드>를 추월하게된 사례를 통하여 황색언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콜린스의 본질에 대한 천착은 학술적인 따분한 접근 방식이 아니라, 활기발랄함과 욕망이 범벅이 되어 흐르는 뉴욕을 배경으로 보도하는 형식으로 다양한 사실들(facts)을 시간 속에 입체적으로 펼쳐보이는 이야기적 방식으로 몹시 재미있다.

황색언론이란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주의에 호소하는 신문의 경향을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외설적이고 엽기적인 사건 혹은 각종 루머 등 독자들의 건전하지 못한 감정을 자극하려 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발생기원은 퓰리처가 「세계 최초로 컬러 만화를 신문에 실었다. (…) 경쟁 신문사에서는 <월드>를 만화 저널리즘이라고 비웃었다. 그래서 “옐로 저널리즘”이라는 별명이 생겼다」(35쪽)고 한다. 이미 옐로 저널리즘으로 독자층을 확보한 퓰리처의 <뉴욕 월드>에 대하여 <뉴욕 저널>의 허스트는 「굴든수프의 사건 수사가 (…) 너무 느리게 움직이면 (…) 자기가 직접 해결에 착수했다」며, 자기 집무실에서「”현대 언론의 진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를 보여준다. 행동 – 이것이 새로운 지표다. 경찰이 이스트 강 살인 사건을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생각할 때 <저널>은 스스로 탐정단을 조직했다. 신문은 선동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에 바로 잡아야 한다”」고 씨부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문의 존재이유를 ‘보도’가 아닌 ‘선동’으로 신문사의 사주인 허스트가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문은 (소극적으로) 기사나 쓰면 안되며,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앞에 나아가 아주 자극적으로) 웅변(선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황색언론의 본질이지만 더 나아가 (선정적인 사건의) 취재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사건 그 자체를 만들기 위하여)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토막난 사체가 과연 누구이고 누가 무엇 때문에 그를 죽였으며, 증거와 진실이 나란함으로써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토막살인 사건의 용의자나 수사, 그리고 증거물과 사건의 인과관계를 풀어가는 수사관의 추리나 변호사와 검사들의 변론은 결정적이지 못하고 사건의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주변을 떠도는 개연성마냥 엉성하다. 사체가 굴든수프의 것인지조차 명확치 않고, 낵 부인과 그녀를 둘러싼 남편, 애인(굴든수프), 그리고 다른 애인(마틴 손)과의 치정 관계조차 분명치 않다. 책을 쓴 콜린스나 당시의 황색언론 모두, 토막난 사체가 ‘누구며, 누가 죽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지 모를 토막난 사체라는 엽기성, 내연의 관계임에도 피살자를 살해를 교사한 내연녀 그리고 그녀의 살인공모자와의 또 다른 치정. 그리고 배신.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면서 내연녀의 직업인 조산사와 관련된 불법낙태 그리고 유기되거나 버려지는 태아 등의 음산한 요소에 황색언론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와 그들의 취재와 보도가 어떠했으며, 그들의 보도에 뉴욕시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고, 수사와 재판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은밀하게 증거 중심으로 인과관계를 따지고 사건의 원점으로 거슬러가야 할 수사는 황색언론들의 보도 탓에 흥미거리로 바뀌었고, 수사현장은 늘 사람들로 붐볐고 치정관계로 간을 맞춘 재판은 라디오도 TV도 없는 세기말, 세상의 온갖 잡놈들이 몰려든 뉴욕의 심심한 시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엽기적인 동시에 외설적인 이야기였고, 황색언론들로서는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엽기적이며 에로틱한 ‘세기의 살인’이었고, <뉴욕 저널>로서는 신문사 순위를 뒤바꾸어 놓을 대박사건이었던 것이다.

‘굴든수프’의 사체가 맞는가? ‘마틴 손’이 ‘골든수프’를 죽이고 토막냈을까? 의혹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마틴 손’은 사형을 언도받고, 당시로서는 실험적이었던 ‘1750볼트 10암페어’의 전기가 짜릿하게 관통하는 전기의자에 앉게 된다. 「<이브닝 텔리그램>은 마틴 손이 평화로이 죽음을 맞다라고 전하고 <뉴욕 선>도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한 마틴 손이라며 맞장구를 쳤지만, <헤럴드>는 독자들에게 처형 소식을 전혀 다르게 전했다. 마틴 손이 처참한 공포 속에 숨을 거두다. 여성 독자들을 늘 세심히 배려하는 <월드>는 마틴 손의 영혼이 떠나는 순간 여성 영매가 손과 교감하다라고 전했다.」(357쪽)

이 세기적인 사건과 사형집행 과정에서 <뉴욕저널>은 1위의 언론사가 된다. 그 후 우리의 천안함 사건과는 약간 다르지만, 스페인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허스트에게 명분이 제공된다. 쿠바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 전함 메인호가 의문의 폭발로 승무원과 함께 아바나 바다로 침몰한다. 허스트는 사건의 진상을 알 생각도 없이「확실한 전쟁! 스페인이 메인호를 폭파시키다라고 <저널>이 선언」(361쪽)토록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우유부단했던 대통령은 언론과 여론에 밀려 그만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한 나라, 그것도 미국의 대통령을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황색언론, 더 나아가 낚시언론이라고 할지라도 그 힘은 가공스럽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면? 노무현 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유명을 달리한 것은 확증되지 못한 것들을 검찰이 (자신들이 말하는 빨대를 통하여) 낚시언론에 흘렸고, 검찰과 언론의 합작에 루머까지 가세한 더러운 말(言)과 말들의 홍수(流言)에 떠밀려 자살하게 된 자체가, “죄가 없다면 왜 뛰어내렸겠느냐?”는 거증이 되고마는 우리나라는, 노랗다 못해 얼마나 황당한가를 반성하게 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뉴욕 저널>은 30만부의 전국 최대규모를 돌파하고, 50만, 100만을 찍고 150만부라는 세계 최대신문이 된다.

교만이 머리꼭대기에 이른 허스트는 자신의 영광을 탈환하기에 안간힘을 쓰던 퓰리처의 <뉴욕 월드>에 대하여 자신들의 <電文>을 훔친다고 비웃으며 레플리즈 W. 더누즈(Reflipe W. Thenuz) 대령의 사망 기사를 관계회사인 <이브닝 저널>에 싣는다. 이튿날 <뉴욕 월드>도 대령의 비슷한 부고 기사를 싣는다. 허스트의 편집자들은 더누즈 대령이라는 사람은 실존하지 않으며, <뉴욕 월드>가 올린 대령의 이름과 가운데 글자를 뒤집어 보면 ‘우린 뉴스를 훔쳐요'(We pilfer the News)가 된다고 밝힌다.

이 정도라면 신문은 경쟁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다. 「정확성-정확성-정확성!」,「누가? 무엇을?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사실-현장감-사실!」(32~33쪽)이라는 문구가 보도국 안에 도배된 퓰리처의 <뉴욕 월드>는 선정성으로 야비한 독자들의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사실보다는 선동을 즐기는 허스트의 <뉴욕 저널>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뉴욕 저널>의 영광은 오래지 않아 저문다. 1951년 영화 ‘시민케인’의 주인공이자 언론왕 허스트가 죽고, <뉴욕 월드>가 합병과 합병 끝에 <뉴욕 월드-텔리그램 앤드선>이 된 것처럼, <뉴욕 저널>, <헤럴드>, <트리뷴>의 잔해와 뒤섞여서 <뉴욕 저널 트리뷴>이 되고 난 후 그냥 사라진다.

사족 : 책에 대한 느낌

요즘 생긴 팩션(Faction)이라는 장르와 딱 들어맞는 소설적인 픽션 장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소설보다 이 책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집요하게 파고 든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있었던 기록들을 채집하여 당시의 뉴욕의 모습과 사건의 영상을 모자이크처럼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자들로 북적이면서 확장 중이던 뉴욕의 생기발랄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끔찍한 토막살인의 공모자로 기소된 ‘낵 부인’과 ‘마틴 손’에게 시민들이 보여주는 기괴한 연정과 열정적인 관심, 그리고 수사과정에서 어떠한 확실한 증거를 얻지도 못했고 공판과정 또한 어떠한 것도 제대로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배심원의 가결에 의하여 사형언도가 내려지는 찝찝함이 있다. 이런 모든 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세기말의 뉴욕, 그 소란스러움 속으로 이끄는 요소이며 흥미롭게 하는 요소다.

책의 모양을 보면, 책값이 왜 이렇게 비싼거야 반문할 정도로 소박하다. 하지만 종이의 지질이라든가 제본은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마음에 든다. 우선 요즘 책들처럼 종이가 빛에 번들거리지 않아서 눈이 편하고 가독성이 좋다. 게다가 종이의 무게도 적게 나가고 호화양장본이 아닌 페이퍼백이라서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읽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한면당 글자수도 많아서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제법 뿌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휴대하기 편하고 가볍지만 내용은 제법 무게가 나간다. 떡제본이라는 점만 뺀다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책의 형태다.

그러니까 책의 형태와 책이 주는 지적인 체험과 줄거리의 흥미로움으로 치자면, 근래에 보기 드문 책이다.

This Post Has 3 Comments

  1. 旅인

    요즘 윤창중의 사건이야말로 엘로저널리즘이나 삐끼언론이 환호성을 지를 호제다.

  2. 위소보루

    한국에 들어간다면 한번 봐야겠네요.

    요새 신문을 보지 못해 인터넷을 통해서만 글자를 접할 수 있는지라 기자들에 대해 환멸을 많이 느낍니다. 사실 관계를 명백히 하지 않고서 추리 소설이나 일기를 너무 쓰는 것 같습니다. 많은 정보 속에서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고 곡해된 의견이 가미된 기사를 믿어버리는 사람들 – 일베로 대표되는 – 이 많아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1. 旅인

      저널보다 日報(하루보도)라는 말 속에서 저널리즘의 맹점이 다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 보도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면 그 신문사는 끝나고 만다는 맹점이 신문이 정론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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