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꿈

한참 꿈을 꾸다가 일어났을때, 거실에서 하얀 빛살이 안방 문틈으로 새어들어왔다. 나는 빛이 사라지기를 희망했다. 시간은 25시 10분 정도? 그 빛은 거실에서 흘러든 것이 아니라 아내가 켜둔 채 잠든 TV에서 하얗게 침대 위로 흘러드는 빛이었다.

지난 주 목금으로 워크샵을 갔다 온 후 봄바람을 맞았나 보다. 감기인지 독감인지 그만 몸져 누웠다. 사람이 앓아선 안될 조류 독감이기라도 한 듯 온 몸의 관절에 이물질같은 통증이 스며들었고 토, 일요일을 아파하다가 잤고 자다가 폐사라도 할듯 아팠다. 그리고 월요일 년차를 내고 방구들에 등을 붙이고 천장을 한번 보고 잤고 깨어나니 봄날의 오후가 노랗게 내 손끝에 물들어 있었다.

오후의 어지러운 햇살을 따라 병원으로 가서 약을 받아왔다.

그림자처럼 길거리의 사람들을 흘려보내며 집으로 돌아와보니 삼일동안 하염없이 잤지만, 다시 약을 먹고 잤다.

그리고 어제 출근을 했고 직장에서 돌아와 ‘직장의 신’을 보고 다시 자리에 누운 후, 가면과 같은 잠에 든 것이다.

잠 속에서 덩치가 큰 한 사내가 칠판만한 큰 책을 내게 건네주며, “이 책은 아름다움과 찬란함이 다 이어져 있는 것이라오. 아마 펼치면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중단하지 못할 것이라오. 나에게 이 책을 돌려줄 때는 반드시 각장의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어야만 하며, 나에게만 돌려주어야 된답니다.”라고 말했다.

사내의 덩치나 권위에 눌렸는지도 모른다. 책을 펼쳐볼 생각을 하지 않고 서가의 한쪽 구석에 앉아 도서관의 각 부분 부분이 꽃이 피듯 열리고 닫혔다 하는 것을 보았다. 도서관의 부분이 펼쳐지면서 어떤 미녀가 나타나 나를 보며 잘아는 표정으로 웃었다. 혹시 아는 여자일까 생각하다가 내가 아는 백인여자가 없다는 것을 기억했다. 다시 도서관의 한쪽 서가가 닫혔다 열렸고 보랏빛 토끼가 내게로 깡총깡총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지금 몇시이며 내가 여기에 왜 와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다가, 가면의 상태로 잠을 자고 있으며 꿈을 꾸는 중임을 간신히 기억했다.

그 사이 보랏빛 토끼가 그만 책 속으로 기어들었고 혹시 토끼가 책이라도 갉아먹는 것이 아닐까 싶어 그만 책을 펼치고 말았다.

책을 펼치자, 책의 각각의 페이지들이 들판, 하늘, 그리고 커다란 집 등으로 자라나며 세상이 되었고, 나는 각각의 페이지를 펼치며 세상의 온갖 형형색색의 색채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다음 장과 다음 장을 펼쳐나갔디. 책 하나가 온갖 아름다운 색으로 꾸며진 세계였다.

온갖 색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대하여 감탄하기도 전에, 각장의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어야만 한다는 걱정을 했고, 아름다운 풍경보다 풍경의 끝에 숨겨져 있을 각장의 연결고리를 찾느라고 분주했다.

각장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하여 세상의 방방곡곡, 밤이 끝나고 낮이 끝나는 곳, 심지어는 들판의 한쪽 구석, 오랑캐 꽃의 보라빛 사이에 숨겨진 각 페이지가 접히고 중첩되는 곳을 찾아서 그 접히는 곳에 땅과 하늘과 들과 바다를 겹쳐 직사각형 책의 형태로 풍경을 접고 또 접었다.

세상은 째깍째깍 시간의 분주한 수다 속에서 지구의 방방곡곡이 하늘과 바다와 심지어는 북극의 오오라의 색에 포개지면서 커다란 그림책 형태로 접혔다. 나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고, 그림책을 들고 도서관 어디엔가 있을 사내를 찾았다.

나를 보고 웃던 미녀가 나에게 다가와, 육감적인 자신의 상반신을 나에게 들이밀고,

“그 책, 저를 주세요”라고 낮은 분홍색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안이 벙벙하여 그녀를 보았을 때, 보이는 것은 그녀의 촉촉한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빨 밖에 없었고 책은 이미 나의 손아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깜짝 놀라 사내를 찾았다.

그때 멀리서 낮고도 큰 소리가 들렸다.

“괜찮소. 책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왔으니 걱정마시오”

한숨을 쉰 나는 이마 옆에 있는 스마트 폰을 눌렀다.

‘4시 10분’,

디지털로 된 하얀 숫자가 내 눈으로 가만히 내려앉았다.

2시간 20분 쯤 더 자야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어디에선가 빛이 각각의 색으로 쌓였고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초록색으로 쌓인 빛들이 찰칵, 만화경처럼 눈꽃 무늬로 접히거나, 내 얼굴모습이 데칼코마니 형태로 내 눈 앞에 펼쳐지고 늘어나고 사라졌다.

꿈 속에서 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지옥이었다.

그렇게 내 모습이 접혔다 펼쳐졌다 하며 깨어나니 여섯시, TV를 켜고 잇빨을 닦으며 소파에 앉아 내가 얼마나 피곤한 밤을 보냈는가를 간신히 깨달았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잘 모른다. 현실이 두려워 꿈을 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꿈이 무서워 아침이면 현실로 도피하는 것이다.”

나도 한번은 꿈 속에 삼백년동안 갇혀 지내다가 간신히 깨어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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