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사람의 길

몇 주전인 2013년 3월 21일~23일, 봄을 쫓아 담양 소쇄원을 지나 정암 조광조가 사사되었다고 하는 화순에서 일박을 한 후, 보길도로 건너갔다가 귀경하는 길에 해남 녹우당을 들렀다. 매화꽃은 피고 동백꽃이 툭툭 지는 길을 지나다 보니 그만 조선의 성리학, 더 나아가 고산과 그의 증손인 공제 윤두서의 외증손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경학의 흐름과 실학 중 중농학파의 자취를 더듬어 간 셈이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의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다는 것을 소식을 들은 고산의 일가족은 ‘남쪽으로 튀어’를 감행하던 중 경치에 뿅가서 그만 보길도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세운 세연정이나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을 보았다. 삽질 규모를 감안할 때 엄청난 재원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 아니라 노역에 동원된 섬사람들에게 품삯이 제대로 지급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뇌리에 떠오른 의문을 해소해 줄 정보는 없다. 다만 고산의 가사문학이 어쩌고 저쩌고만 나올 뿐이다. 즉 나라는 난리가 났는데, 고산은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일가족은 잘들 놀았다는 이상의 정보는 부재했다. 이들이 잘 놀았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죄없는 섬사람들은 뭔 난리인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세연정이다, 동천석실이다 불려가설랑 품삯도 받지 못하고 삽질을 해댄 것은 아닐까?

이런 느낌이 들다보니 백성의 입장에서 윤선도 평생의 정적이라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며, 다산이 목민심서를 쓰는 등 자랑스런 선조라는데, 과연 그의 학문이 민중의 이용후생으로 전환될 수 있는 시공간이 마련되기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미수에 그친 목민의 학문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도올 선생(후에 도올로 존칭 생략)은 “조선왕조는 귀족정치에 의하여 왕권이 제약되는 다양한 장치들이 활성화되었다. 사림의 등장도 『맹자』라는 민본사상의 존중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의 정맥이 모두 『맹자』를 골격으로 한 것이다. 정암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순결성, 그러니까 그의 정치적 좌절은 그의 이념을 도덕적으로 순선한 인간의 표상으로 이상화시켰고, 이러한 이상주의를 계승한 것이 바로 퇴계의 理의 능동적 자발성을 인정하는 특이한 성리학적 체계였다.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쟁이 결국 맹학의 핵심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한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203쪽)고 말한다.

여기의 민본사상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맹자를 읽을 수 밖에 없다.

다른 번역서는 놔 두고 굳이 비싼 도올의 ‘맹자 사람의 길’을 읽고자 하는 이유는, 그가 해석학적인 입장에서 맹자라는 서물이 탄생했던 당시의 구체적 정황을 재현하고, 맹자에 대한 각종 번역서와 관련서적을 바탕으로 번역의 권위를 확보하고 본증과 방증을 들어 해설해줌으로써 맹자에 대한 이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도올은 기대는 물론 간만에 고전을 읽는 재미를 주었다.

불구하고 ‘맹자 사람의 길’을 읽으면서 부딪힌 것은, 과유불급의 문제, 즉 맹자라는 서물의 선 이해를 돕고자 했던 도올 선생의 해설이 자신의 ‘논어한글역주’에서 “독자들이 나의 편견의 전제가 없이 『논어』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운 생각이 든다.”(182쪽)고 한 것과 같았다. 때때로 고전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떤 구절에서는 “좋지! 좋지?” 하고 노홍철 처럼 의미를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맹자 한편으로 춘추시대와 다른 전국시대의 정치, 군사, 과학, 문화와 당시의 제자백가들에 대해서 문화사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도올을 지나, 맹자라는 서물로 넘어가 보자. 맹자라는 책은 애매하다. 논어와 같이 제자들이 모아 편찬을 한 것도 아니고, 노자의 도덕경처럼 논문도 아니며, 장자처럼 우화집도 아니고, 대충 맹자 스스로 쓴 자서전인 것 같다. 자서전처럼 교묘한 구라가 또 어디있을 것이며, 어느 한 인간의 인격을 자서전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처럼 모호하고 시선이 흐려지는 것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논어를 읽으면 공자가 보이는 데, 맹자를 읽다보니,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더 생긴다. 그것은 자서전이 지닌 독특함 때문이 아닐까? 자서전은 대충 세인들의 오해(오해가 아니라 사실일 경우가 더 많음)에 대한 변명,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석연치 않은 해명, “너희들은 자잘한 고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이렇게 스케일이 크걸랑” 하는 침소봉대, 그리고 “청와대가서 대통령한테 삿대질을 해가며 무슨 소리를 한 줄 알아?” 등의 자랑질 등으로 도배된 것이 아닌가? 물론 이른바 아성이라고 칭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다 노가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맹자의 문장의 스케일도 크고, 민본이라는 그 이상도 대단하지만, 그것이 자기 이데올로기에서 생활과 실천에 이르면 어떠했는가 하는 점에서 논어는 공자의 모습의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으나, 맹자에는 맹가(孟軻)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강렬한 향수냄새가 등청할 뿐이다.

“천하의 광거에 거하며, 천하의 정위에 입하며, 천하의 대도를 행하노라! 뜻을 얻으면 만천하의 백성들과 정도를 실천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라도 그 정도를 실천하노라! 부귀가 그를 타락시킬 수 없고, 빈천이 그를 비굴하게 만들지 못하며, 위무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노라!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비로소 대장부라 하는 것이다.”(346) 이 글을 보면서 이것이 대장부의 개념 규정인지 맹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도올의 맹자에 대한 극찬에도 불구하고 맹자적 폼생폼사와 민본이야말로 왕조체제인 조선이 후대로 내려가면서 훈구대신에서 신진사림으로 권력구조가 쉬프트되면서 기득권이 된 민(소수 사대부 등 양반)의 부단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국본인 왕권의 약화와 함께 결국 일제에 병탄되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맹자의 舜·啓·伊尹·공자 등등의 인물에 대한 이와같은 자의적인 해석과 날조가 후세에 과연 도움이 되었을까? 이러한 왜곡으로 도통이나 도학적 전통은 확립했을지 모르겠으나, 결국 실존에 바탕하지 않은 이들의 날조된 허구성이 결국 이 땅 조선의 위선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예교주의를 발아시킨 토양이되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결국 ‘맹자 사람의 길’에서 나는 전국시대의 문화사나 엿보았지 맹자의 사상의 신선함이나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책의 847쪽에 향원(鄕原)이 나온다. 향원은 공자가 극히 미워했다고 했는데, 향원이란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위하여 여론에 영합하는 사람, 덕이 있다고 칭송을 받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며, 수령을 속이고 양민을 괴롭히던 토호, 겉으로는 선량한 척하면서 환곡이나 곡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따위의 일을 한다고 되어 있는데, 조선의 양반이란 좋건 나쁘건 민본을 한답시며 자신들은 병역을 기피하고, 향리들과 결탁하여 천석, 만석, 대규모 장원경제를 운영하면서도 세금은 한푼도 아니내는 것이 양반, 즉 선비라며 단물만 빨아먹는 민본, 즉 향원이 되어버린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봄을 찾아 나선 남도의 여행 끝에 나는 향원의 흔적만 엿보고 왔지만, 돌아와 자료를 뒤적이던 중 송시열과 대척점에 설 수 밖에 없던 윤휴라는 잊혀진 거유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스승인 성호 이익의 스승이지만, 송시열이 사문난적(요즘의 빨갱이에 해당)으로 모는 바람에 결국 역적의 버금가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결국 사약을 받게 된다. 우리가 실학자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성리학을 하는 유학자일 수 밖에 없던 성호 이익은 사문난적의 제자라는 오명을 짊어지고 갈 수 없었기에 결국 자신이 모셨던 스승 중 윤휴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고산 윤선도와 미수 허목의 제자일 뿐이라고 한다.

윤휴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절대시하는 주희를 자신과 대등한 학자라고 보았다. 그는 주희의 사서에 대한 집주의 맹신에서 벗어나 주희나 주돈이, 이정 형제 등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새롭게 경전을 해석하려는 방향을 취했다는데 있다. 중용에 대한 주희의 주석의 오류를 찾아낸 자신에게 반발하는 송시열 등에게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라고 한다. 송시열은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중단을 촉구했으나, 윤휴는 자신의 정당성을 계속 주장한다. 그에 따라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결국 사약을 받기에 이르지만, 후일 제자들인 성호와 다산 등에 의하여 주자의 사서에 대한 해석이 비판받기에 이르름은 물론 청대 고증학의 흥륭으로 인하여 청의 학자 염약거는 주희가 학문의 방법론으로 삼았던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핵심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은미하나니 오로지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을 수 있으리라”1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상서의 대우모에 나오는 구절이 매색(梅賾)의 위고문(僞古文)임이 밝혀지고 주자의 방법론 자체가 거짓에 기반하는 만큼 주자의 학문의 권위가 실추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윤휴의 제자의 한참 제자인 다산은 ‘매씨서평’을 통해 주자가 분명 매색의 위고문에 기초하여 자신의 학문을 펼쳤으되, 어찌 학자로서의 그 업적이 어그러지겠느냐고 주자를 옹호한다. 즉 그의 스승의 한참 스승은 주희 때문에 독배를 마셨지만 그는 오히려 주희를 변론하는 아이러니에 처하고 만다.

이러한 송시열의 주자에 대한 원리주의적 맹신은, 20세기에 들어서도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

1947년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교수(목사)가 “성경의 기록은 성령이 기록자에게 하나하나 일러준만큼(축자영감설), 성경의 일자일획도 그른 것이 없다는 성경무오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하여 박형룡 박사는 김 교수를 자유주의신학 옹호자라고 비난한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한국의 보수정통주의 핵심인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 교회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고 응수한다. 박형룡은 장로교 칼뱅주의와 청교도적 경건주의가 서구 계몽정신의 격류를 헤쳐나오는 동안 형성된 보수 정통신학임을 대변하며 비판적 성경연구 태도나 역사주의 및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면 기독교 진리는 뿌리까지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국 김재준 목사는 장로교 목사직에서 파면을 당한다. 그래서 한국기독교 장로회와 한신대학교를 세우며 분립함에 따라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로 갈라지게 된다.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장로회는 복음의 자유정신, 신앙양심의 자유 존중, 우상타파, 사회윤리적 책임의식, 성서의 비판적 연구 수용 등을 주도했고,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의 예언자적 저항 운동의 기반이 된 반면, 예수교 장로회는 원리주의에 입각하여 한국의 개신교가 보수화, 우경화의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보수화, 우경화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원리주의적인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신 앞에 개방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신앙이 축자영감설이란 재갈에 물리고 이교도외 이단을 가르는 각종 신앙고백과 사도신경에 입각함에 따라 사랑해야 할 이웃을 적으로 만들고 개신교야 말로 배타적이고 비관용적인 종교로 자리매김 했을 뿐 아니라 적대의 정도를 심화시켜가고 있다.

결국 맹자의 민본사상에 기반하여 개국한 조선조는 결국 사민(사농공상)이 근본이 아니라, 선비(士) 만이 민(백성)이자, 본(근본)이었고, 이들 양반이라는 것들은 왕이라도 양반과 선비와 사림의 뜻에 반할 경우,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늘 왕을 위협해 나갔던 것이다. 즉 민본은 간 곳 없고, 천하지대본인 양반의 무소불위한 권력 만 파르라니 남았던 것 아닌가? 오늘날 사랑의 복음이 자신들의 믿음의 원리와 가치를 위하여 사랑을 포기한 것처럼…

맹자는 사서에 낄 만한 서물이 못되는 것 같으며, 맹자가 과연 조선 역사에 긍정적이었는가 또한 엄밀하게 재평가가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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