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글을 읽으며…

요즘 슬라보예 지젝을 읽고 있다. 지젝은 재미있지만 형편없는 번역 때문에 어렵다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때때로 지젝이 글 또한 어렵다.

법의 외설적 보충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빌려왔겠지만 ‘초자아에 의한 법의 외설적 보충’이라는 말이 나온다. 책을 읽다 말고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고 검색을 해보니 바로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해설인 셈이다.

우선 ‘법의 외설적 보충’이란 우리는 법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며 우리를 보호해주며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그런데 어느 날 법원이나 검찰에서 소환을 당하면, 그 순간 법에 대하여 갖고 있던 통념은 그 순간 와장창 깨지고 법이 결코 정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추잡하고 더러운(즉 외설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법원이나 검찰에 혹시 아는 사람 없느냐고 학연, 혈연, 지연을 총동원할 뿐 아니라 촌지와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초자아’란 팔루스, 즉 아버지, 신 등등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판사들이 형성하는 것인 만큼 바로 ‘사법부’이다, 직장인에게는 ‘회사’ 조폭에게는 ‘조직’이 되듯.

김교수의 박판사에 대한 석궁 테러는 박판사가 석궁으로 피습되었든 안되었든 사법부에 대한 테러라고 본 신판사나 이판사에게는 법의 정의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김교수가 옳은 탓에, 사법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김교수는 유죄가 되어야 하며, 유죄인 탓에 김교수는 잘못이고 사법부는 옳은 것이 된다. 즉 초자아의 과잉에 의한 외설, 유죄로 끝나게 되어있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김교수는 수학적 질서에 입각하여 이러한 법의 외설적인 측면에 대하여 보충할 생각은 않고, 사법부에 대하여 법대로 하자고 고집을 피운다. 그런 탓에 김교수는 적진에서도 판사들을 코너에 몰아놓고 훅과 어퍼컷 등을 화려하게 쏘아붙지만 결론은 적들이 판사이기 때문에 판정패로 진다.

다시 한번 부러진 화살을 보아야겠다.

insist

“존재의 반대가 비존재가 아니라 존속이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존속하며,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다.”(실제의 사막… 37~38쪽)는 지젝의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경우(존재) 그 사랑은 흘러가버린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경우(비존재) 그 말을 하지 못했다는 후회로 존속한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랑은 흘러가버리지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사랑은 멈춰서서 결국 추억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진정으로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내어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지젝 실제의 사막… 37쪽)는 말은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과거사(일제와 대한민국사)의 더러운 진상을 제대로 파헤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잊혀지지 않은 채, 트라우마로 우리나라를 좀 먹고 있다는 것은 물론, 이른바 추억이라고 하는 것들이란 사실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어름하게 받아들인 상상의 현실에 불과했기 때문에 말소시키지 못한 기억일 뿐이라는 것을 설명해준다.

“악한 자가 증오하는 것은 善이 아니다”라는 노발리스의 진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즉 악한 자가 증오하는 것 또한 惡이라는 점이며, 문제는 惡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이며, 그 惡에 대응하는 형식에 따라 악한 자와 선한 자가 갈라진다는 점이다. 즉 나는 절대로 내가 늘 생각하는 선한 존재, 온당한 편에 입각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늘 정의와 온당한 편에 서 있기 위하여 고민하고 반성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Homo Sacer

호모 사케르, 이는 ‘벌거벗은 생명’을 가리킨다.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의미는 주민등록증이 말소되어 살아있되, 국가의 기록 상으로는 부재하는 상태 혹은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가리킨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있은 이후, 관타나모 기지에 포로들이 수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각종 고문과 린치 등으로 인권 문제가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하여 2004년 중반 NBC에서 다른 관타나모 포로의 운명에 대한 대담에서 ‘그들은 폭격이 놓친 사람들’로 의당 죽어야 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들의 처리 문제를 비난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즉 이들은 폭격으로 이미 죽었어야 하는 생명들로 생존권을 박탈당한 자, 즉 호모 사케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인권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고 미국의 이들에 대한 대우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자(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법원은 어떻게 선고를 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 경우 다시 주민등록증을 살리고 난 후 법적 절차를 밟던지 아니면 유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용산참사에서 불타 ‘죽은 자들’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그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호모 사케르’로 구분되지 않는 생존권을 지닌 자라면, 이들을 죽인 공권력은 법적으로 면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들이 ‘호모 사케르’로 공권력에 의해 함부로 처분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호모 사케르’는 즉 ‘안 죽은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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