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라, 생각하라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글들이다. 반면 지젝의 현란한 수사학과 방대한 지적 유희를 감당하기에도 역부족인데, 번역마저 어렵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읽어본 결과, 이 책만큼 어렵지 않다. 원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번역의 문제인 것 같다. 번역된 글이 어렵다는 것은 번역가의 역량 뿐 아니라, 책이 갖추어야 할 품질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는 우리 출판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14,000원을 주고 책을 샀는데, 번역 때문에 70% 밖에 이해를 못했다면 독자는 4,200원 만큼 손해다. 뿐만 아니라, 난삽한 글을 이해하기 위하여 수많은 독자들이 소모하는 시간과 정력을 감안한다면, 불성실한 번역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독자에게 제공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거의 매국에 준한다. 게다가 독자는 이해되지 않는 글을 놓고 자신의 IQ가 모자르거나 가방끈 길이가 짧다는 자괴감 끝에 우울증을 겪게 되거나, 원저자인 지젝에게 “왜 이따위로 글을 쓰는 것이냐”고 쌍시옷을 남발하며 분통을 터트리게 되는데, 만약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면 사회의 불안을 조성한다고 ‘지하철 공포남’이라는 동영상이 배포되고 대대적인 신상털기가 시작되어 급기야 대인기피증이 생기게 된다면 출판사나 번역자가 책임을 질 것인지 모르겠다.

출판계는 고급+호화+양장본(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하드보드가 아닌 페이퍼 백을 좋아한다) 등 외형 중심의 고가 전략은 추구하면서도, 책의 실질적인 면, 양질의 번역, 책의 내용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한권 짜리 책을 두권 세권으로 뻥튀기하는 등의 얍상한 짓거리나 한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책값이야말로 OECD 국가 중 대학등록금이 두번째로 비싸다는 것이 서러울 정도로 비싸다. 이렇게 난삽한 번역본을, 엄청난 가격(248면에 14.000원: 장당 106원)에 판다. 상품가치 측면에서 볼 때, 책은 싸거나, 내용이 풍부하거나, 재미있거나, 쉽거나, 배울 것이 많아야 산다. 이런 구색은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맛없는 풀빵을 팔면서 손님들이 사 먹지 않는다고 지랄하는 것과 같다.

형편없는 번역과 고상한 책값에도 불구하고 슬라보예 지젝은 재미있고, 배울거리가 있으며, 시대에 대한 날선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좀더 읽기 쉽고 싸게 시장에 내놓는다면 상품성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양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반값 등록금과 함께 반값 책값 투쟁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반값 등록금은 4년이지만 반값 책값은 평생에 걸치며 국민 전반에 걸친 건전한 교양은 물론 백년 천년갈 국가의 풍요로운 지적 토양을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난해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따라 지젝의 생각을 더듬어가다 보면 전세계의 총체적 상황 속에서 2011년에 분출되어 나온 사건(아랍의 봄, 월가점령 시위…)들이 현대 자본주의가 적대시하는 핵심 아젠다들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재벌 및 정치권력과 (기독교/뉴라이트/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들이 결탁하여 ‘소고기 반대 촛불시위’에서부터 ‘용산참사’를 지나 ‘미네르바 사건’, ‘천안함 사태’ 등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와 빈부격차·인권·환경·교육·복지 전반의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건전한 진보로 인정하지 못하고, 빨갱이 혹은 종북으로 매도해야만 하는 음산한 내막을 알려준다. 나치가 ‘반유대주의’를 사용한 반면, 우리는 ‘빨갱이’, ‘종북세력’을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의 방패로 활용해 왔다. 지젝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들에 대하여『지배 이데올로기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중요성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지배적인 반응이야말로 「와 남 니하단」(눈 가리고 아웅)이 아니었던가?』(p20)하고 묻는다.·

빨갱이나 종북논란(Bvalgangism)과 관련하여, 국가나 사회 내의『계급적대를 부인하고 전체를 대표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방법은, 그 적대의 원인을 그 자체로 사회를 위협하는 반사회적인 요인이자 사회에서 배설된 과잉의 상징인 외국인 불청객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우리는 Bvalgangism)는 … 그 자체로 본원적 이데올로기”(p56)라며, 1930년대에 히틀러가 실업 등 모든 문제의 배후로『유대인의 음모를 환기하자 (독일 국민들에게) 단순한 인식적 지도가 제공되어 모든 상황이 분명해졌다』(p76)고 한다. 박정희 시절의 인혁당, 민청학련 등 숱한 공안사건들은, 유신철폐 등 독재에 대한 민중의 반대에 직면하자, 조작한 시국사건들로 빨갱이라는 논리로 도배되어 있다. 연루된 자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깃들지 못하고, 북한의 지령에 입각하여, 체제 전복을 도모하고,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는 법의 이름 아래 날조된 사실들로 점철되어 있다. 체제 내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다수의 선량한 우리와 달리 이들은 이질적이므로 불온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불온한 만큼, 체제의 안정(즉 각하의 심기)을 위해서 불문곡직 총살도 불사해야 한다는 사법부의 졸렬한 판단도 함께 했다.

2012년 대선과 관련해서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는 진보진영과 민주통합당의 대연합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의 지원이 2% 모자랐다는 점은 있지만, 문재인이 왜 졌는가 하는 질문에 “대운이 아니었다”, “민심을 읽지 못했다” 등이 아닌 꽤 복잡하지만 그럴듯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문재인씨가 제공하는 아젠다 측면에서는 도시의 한쪽 구석의 공원이나 전전하는 돈 없는 어버이들이나 저소득층의 교육과 분배, FTA와 농촌문제 등에서 공화당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유리함에도 저소득층과 중노년층, 농어촌에서 표를 얻지 못했다. 자신들이 아닌 재벌이나 자본과 놀아나겠다는 여당에 표를 몰아준다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지젝은 지배계급은 경제적 계급대립을 도덕적 문제로 자리를 바꿈으로써,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고, 하층계급의 분노에 불을 지필 수 있다고 한다. 지젝은 문화전쟁이 곧 전치된 양식의 계급전쟁이라며, 문화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첫째, 양 진영이 있어야 하는데『문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보수 기독교)에 저항하고 다문화적 관용을 옹호하는 데 정치를 집중하는 계몽된 자유주의자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제』(p72)라고 한다. 분명 문재인을 지지했던 조국, 이외수, 나꼼수, 심지어 윤여준 등은 문화를 대변하고 보수(기득권층이 아닌 하층계급)는 그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다문화적 관용과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싸움은 ‘하층계급’의 이른바 비관용, 근본주의, 성차별주의와 대척점에 설 때가 많다.』(p73) (예로 들어서 미안하지만) 조국 교수의 가방끈 길이는 이들을 재수없게 했고 무조건적인 반대 기류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반면 조실부모하고 어린 동생을 둘씩이나 먹여살려야 했던 나이든 소녀 가장은 가난한 서민들의 눈시울을 적시는 심파로 다가왔던 것이다. 셋째, 문화는『차이를 인정하고 적대를 공존으로 바꾸려는 논리』를 따르는 반면, 보수는 계급투쟁의 목적인 적대의 논리를 계속함으로써 결국『빨갱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막간다는 것이다. 즉 Gabangknism과 Namoosickism의 대립은 결국 Bvalgangism으로 귀착되고 “그래! 나 무식하다. 어쩔래?”하는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자신의 이익이고 자시고 간에 공화당(새누리당)을 찍게 되고, 부자감세는 (농어촌이나 저소득층인) 자신들에게 제공될 예산을 삭감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미국산 농수산물이 ‘이마트” 등을 통하여 물밀듯 들어와 농어촌 경제의 붕괴를 자초하고 거대 유통재벌의 배만 잔뜩 불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잡한 전치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강남 좌파라고 한 조국교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의 주구, 돌아온 탕자, 강남 우파의 선도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지젝은 이런 논리의 배면에『직접적인 사회 이데올로기적 폭력보다 훨씬 더 섬뜩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이 자리잡고 있다. 이 폭력은 더 이상 개인이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이다. … 현실은 실제 인간들이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회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현상이나 사태가 나을 것 같다)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이며 유령같은 논리』(p185)라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순수하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인 자본의 폭력은 돈없고, 빽없는 용산의 세입자나 쌍용차 및 한진 중공업의 해고근로자에게 향하고 있는 공권력에서 확인된다. 자본이라는 치명적인 악령의 논리 속에서 제 3세계는 굶어 죽고, 생태계는 파괴되어 이상기후가 지구를 뒤덮고 해수면이 안방까지 차오르는데, 미국은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지젝은 1971년에 있었던 닉슨의 ‘금본위제 포기’를 미국 정부가 적자와 씨름하는 대신, 적자를 늘리기로 한 결정이며,『끊임없이 몰려오는 자본을 영속적으로 이전시켜 미국의 적자를 처리할 재원을 마련하면 된다.』(p45)고 적자의 책임을 여타세계로 전가하는 반면, 자신들이 국제사회에서 신뢰받고 있기 때문에『전세계 국가들이 미국에 잉여 수익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p47)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요인에 기인하는 만큼 미국은 만만한 나라를 골라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준비된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사태들을 촉발한 자본주의를 놓고 지젝은 우리의 반자본주의 정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한다.『이렇게 도를 넘는 (자본의) 행위에 맞서 싸울 방법이 민주적 자유주의 틀이라는 원칙만은 가차없다 싶을 정도로 당연시된다』(p161)고 지적한다. 그는『실제 자유의 핵심은 (자유선거, 언론의 자유 등 정치적인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인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혁』이다.『우리가 소유구조나 직장 내 관계 등을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 것은 그 문제들이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며 민주주의『그 자체가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가동을 보장하는 ‘부르주와’ 국가 장치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p162)고 준엄하게 경고한다.

멈춰서 생각해 볼 것들!

『중동 협상 역시 평화의 문제가 관건이 아니다. ‘평화협상’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p80) 강자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초콜릿은 좋지만 무지방…콜라는 좋지만 다이어트 콜라…마요네즈도 좋지만 콜레스테롤이 없어야…섹스도 좋지만 안전한 섹스…』(P098)라는 계몽된 소비주의적 쾌락주의는 향락은 용인되고 심지어 권유되지만, 우리의 정신적·생물학적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 건전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이로 인하여 자본은 신제품을 판매할 영역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헤이스 규약은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춰 성적·사회적 규약을 강요했지만, 새로운 윤리학은 건강에 초점을 둔다. 이제는 우리의 건강과 복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악인 것이다.』(P103) 이로 인하여 흡연만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마치 빨갱이만 처단한다면 어떤 나쁜 짓을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지젝은『그렇다면 유럽연합은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가? 물론 여기서 진짜 질문은 ‘대체 어떠한 유럽연합을 말하는가?’일 것이다.』(p90)고 묻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가? 그런데 도대체 어떤 대한민국을 말하는 것인가?”

PS: 별다섯을 주어야 하나 별셋을 준 이유는 너무 고생스럽게 이 책을 읽게 만들어 준 번역자의 탓이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면 영문으로 읽어보고 싶도록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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