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Understand 라캉이라는 흐린 시선으로

이 책은 『How to Understand 라캉』이 아니다.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지젝의 입장에서 쓴 글일 뿐이다. 라캉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거나 이해를 위한 해설서로 너무 어렵다는 지적은 주제를 넘는 이야기다. 정신분석학, 게다가 라캉의 난해성 위에 수놓아진 슬라보에 지젝의 현란한 수사학적 언변,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릴 판에 옮긴이 박정수씨의 번역마저 이 책을 어렵게 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슬라보예 지젝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대면하는 정신분석가의 입장에서 라캉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현실’이란 것은 처음부터 구성된 어떤 것」으로 보고 우리로 하여금 「욕망의 기본 좌표와 곤경에 대면」하도록 「라캉을 이용하여 우리의 사회적, 리비도적 곤경을 설명할 것」이라고 한다. 라캉을 스스로 독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지젝의 라캉에 대한 讀法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라캉을 이해하려고 할 때 마주하는 곤경은 라캉이 말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알듯 모를듯한 주체와 타자 그리고 실재들. 이것들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설명되어지지 않았거나 이해되지 않은 채, 종기처럼 들러붙어 자신의 지적 무능을 탓하게 한다. 이런 내적 갈등 속에서 이를 악물고 글을 읽다보면 자연 머리가 아파질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 지젝을 더욱 그럴 듯하게 만들어주는 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라캉의 이러한 실재는 라캉의 기호(S/s)에 대한 생각에서 기표(S : 언표 행위)와 기의(s : 언표 내용) 사이의 ─ 는 기표와 기의 사이를 가로막는 저지선인 것처럼,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 가 가로막고 있는 관계로 알 수 없거나 아니면 아예 기의가 없이 기표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것이 라캉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주체·타자·실재 또한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꿈과 현실이라는 현상 만이 있었다. 현실과 꿈의 틈을 비집고 서서히 드러나는 끔찍한 병리 현상들이 자신에 대해서 설명해주기를 요구했고, 프로이트와 라캉이 가설적으로 만든 존재가 이제는 마치 생명과 함께 태고부터 있어왔던 정신 현상의 메타적 실재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일 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캉의 실재들은 이름만 붙여진, 어떤 존재하지 않는 존재(un-being)이다. 이것들은 복잡한 정신 현상을 설명하다가 만나게 되는 음산한 교차점에 대한 좌표일 뿐이다. 하지만 그 좌표가 일정하다고 볼 수는 없고 때때로 자리를 옮기거나 때로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 거기에 살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지젝의『How to Read 라캉』은 머리를 써가며 이해하려고 읽는 것보다 그냥 읽는 편이 낫다. 지젝의 화려한 문장은 “그 현기증 나는 외양이 어떤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을 우리에게 줄 수 있지만, 그런 허울에 빠지지 않는다면 이 시대의 병리적인 현상에 대한 뚜렷한 시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소비자로서 번역의 품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책을 옮긴이 박정수 씨의 역자 후기에 대해서는 참으로 공감이 가지만,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이 남는다.

책의 번역이 어렵게 된 것 같다. 번역자는 독자와 작가 사이에 끼인 존재이며 그는 분명 원문을 번역함에 있어서 원문을 읽을 수 없는 독자에게 보다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쉽게 이해하거나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인문학술서라는 점에서 그는 독자로서 원문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2차 독자에게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분명 옮긴이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뭔지 모르게 답답하다.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기표와 기의라고 자리잡힌 용어가 언표 행위와 언표 내용이라고 번역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미 자리잡힌 낱말을 자의적으로 언표 행위 등으로 바꾼다면 그것이 동일한 의미를 내포한 다른 단어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의미라고 오해한다.

증환이라는 단어는 분명 한자어를 바탕으로 한 단어다. 그렇다면 증환이라는 단어 옆에 le sinthome(불어를 잘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신조어다)라고 붙이기 이전에 症幻이라고 한자를 달아주는 센스가 있어야 한다. 나는 간신히 이 증환이란 단어가 증상 – 환상 – 증환의 증환으로 症狀과 幻想의 압축인 症幻이라는 것을 간신히 알았다.

책 97쪽에는 “라멜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집스럽게 존속한다. 그것은 비실재적이고 순수한 유사(semblance) 존재이며, 중심의 공백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현상들로, 그 지위는 순전히 환영적이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왜 semblance를 외관이나 허울로 번역하지 않고 유사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원문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이 문장은 “라멜라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고집스럽게 자신을 주장할 뿐이다. 그것은 실재가 없이 순수한 허울 만 있는 것이며, 텅 빈 내부를 덮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로, 그 지위는 순전히 환영일 뿐이다”가 아닐지 모르겠다. 이런 점 때문에 어떤 독자는 책 19쪽의 ‘연속적인 환경’을 ‘우발적인 상황'(contingent circumstances)의 오역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은 프로이트와 라캉이 입각해 있는 지점의 풍경을 충분히 조망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 풍경은 한마디로 충분히 외설(猥褻)적이다. 즉 추잡하고 더럽다. 그렇게 추잡하고 더러운 것은 프로이트와 라캉이 인간의 본성을 性善도 性惡도 아닌 性性(인간의 본성은 음란하다)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현상의 분석에는 탁월한 반면, 앞날에 대한 시각은 낙관적이지 못하고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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