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뭇 것도 아닌 자의 변

‘객지’를 읽은 것은 행운이다. 방랑이란 헤르만 헷세의 소설처럼 낭만적이고, 고독하며, 오랜 도보여행 끝에 깊은 침엽수 숲을 벗어나 호밀이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을 걸어가는 것인 줄 알았다.

고1 2학기가 끝나가고, 아무 것도 아닌 아이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 책이라고는 교과서 외에 읽어본 적이 없다는, 친구 녀석의 팔 겨드랑이 사이로 혐오스럽게 뾰족이 나온 책 모서리를 보았다.

“그것 모냐?”
“책이다.”
“짜샤 그걸 누가 모르냐?”
“객지다.”
“아쭈구리. 그런데 읽기는 했냐?”
“너 황석영이라구 아냐?”
“들어보기는 했다.”

황석영은 당시 신예작가로 국어 선생의 친구라고 했다.

녀석은 며칠동안 등교 때도, 오줌누러 갈 때도, 라면가게로 가기 위해 담치기를 할 때도, 객지를 겨드랑이 사이에 찔러넣고 다녔다. 빌어먹을!

값싼 문고판 만 사 읽던 나는, 비싼 돈을 주고 비닐포장이 된 단행본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고 밤을 세워 그 책을 다 읽고 만다.

내가 알고 살아왔던 세상 그리고 가난한 자와 삶의 구석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세상, 엄청나게 다른 세상이 같은 공간에 중첩되고 있다는 것. 부랑자와 창녀, 공사장 인부들이 타향으로 내몰린 사연과 그들이 가는 길이 가파르고 아득하다는 것을 객지를 통해서 간신히 알았다. 방랑, 즉 아무 곳에도 서식하기 힘든 나날들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만, 자유라는 것이 헷세적인 낭만이 아니라 작두날 위에 맨발로 오른 것처럼 고달프고 위험천만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겨울방학이 왔다. 변두리의 논뚝을 빌려 물을 대고, 북풍 칼바람에 열려 스케이트장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 않겠냐던 친구의 홀어머니에게 그 해 겨울은 잔인했다. 추녀에 고드름조차 얼지 않았고 햇볕 아래에선 소매를 걷어야 할 정도로 따스했던 그 해 겨울, 나는 추위에 떨었다.

한발로 쩍쩍 갈라졌던 호남에서 작가의 상상의 지점인 ‘삼포로 가는 길’ 위로 겨우내 눈이 내렸다. 함바집의 널판지 사이로 우풍이 진종일 우우 울고, 비게로 섰던 통나무를 도라무깡 속으로 집어넣어도 타닥타닥 불길은 일지 않고, 추적추적 내린 눈길에 발끝이 젖은 나그네의 목덜미에 눈발이 쑤시고 들어왔다.

방학동안 아랫목에 배를 깔고 혹은 창 가에서 서성이며 가난하고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집하여 하염없이 읽었다. 집으로 놀러온 친구에게 겨울이 끝나기 전 서울역 앞 노동자 합숙소에서 며칠이라도 자보자고 했다. 또 염천교에서 피를 팔고, 허혈로 노래진 하늘을 이고 밥을 사먹어보자고 했지만, 객기에 불과했기에 고1 방학은 아무 일없이 끝났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내가 된 나는, 고2가 되었고, 간신히 똘반을 면하고 우반에 들어갔다.

방랑과 여행을 희망하면서도, 형이 삼분지 일 쯤 줄을 치다만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을 펼쳐놓고 칠판을 바라보았다.

8교시라는 긴 시간동안 칠판 만 바라보았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제는 믿을 수 없다. 무엇을 배우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때론 책상 밑의 무협지를 읽었을 것이고, 재수가 없는 날은 선생에게 불려나가 문제를 풀곤 했겠지만, 내가 배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 배우는 것들은 늬들이 사회에 나가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쓸모가 없다. 단지 성적을 올리기 위하여 너희들은 이 무의미한 것들을 외우고, 성적을 따고,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른다. 대학에 합격하고 나면 너희들이 3년동안 배운 것을 쓰레기통에 몽땅 쓸어넣어도 좋다.”

하지만 아이들은 2~3년의 가치 밖에 없는 지식나부랭이를 박이 터지도록 배우고 외웠다.

8교시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공부하는 것에 낭비하기 보다, 나는 ‘나는(飛) 법’을 연구를 하거나, 불면증 때문에 잠자리에서 사용하곤 했던 유체이탈을 눈을 뜨고 했거나, 불순한 영혼을 정화시키는 연금술을 터득하거나, 장자의 조궤함을 노자적 순수이론으로 치환하여 공식화하는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시험 답안지의 명료성이나 교과서적 자명함보다 – 이런 것을 추구했다면 분명 전교 1등을 했을 것이다 – 산다는 것의 모호성을 증폭시켜 심심함에서 벗어나거나, 내용은 공허한 데 너무 그럴듯하여 폼나는 것들, 즉 신이나 주문, 영혼이거나 정신 혹은 이 모든 것의 통칭으로서 날아다니는 것들에 대한 지난한 명상, 정신과 감정 간의 교호와 되새김을 통한 연금술,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유보다, 인간을 둘러싼 참극과 아수라장 속에서 이기적으로 행복을 찾고 찬란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자기최면. 세상의 불합리야말로 썩어빠진 인과율과 함수로 아우를 수 없는 장대한 드라마라는 것. 그래서 학문이 문학이 되고 예술로 치환되어가는 그런 것에 대한 몽상 속에 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것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불면증이 끝난 후부터 술을 마셨다.

물론 허무함 같은 것을 느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복했다.

행복이란 사람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궁극임에 반하여, 모호했다. 쾌락을 통해서 다가가는 방식이 있는 반면, 고행과 같은 것을 택하기도 하는 것이며, 더 이상 삶이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투명하게 인식하고 자살마저 서슴치 않게 만드는 것이 빌어먹을 행복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다가가기는 힘들어도, 눈 깜박할 사이에 스쳐지나며, 멈출 수 없어 늘 과거 한 때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이것은, 고되고 아플 때에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문득 자신이 언제, 한번이라도 행복했던 적이 있는가 하고 반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감히 행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행복을 누렸다기 보다, 최소한 불행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일 뿐이다.

나에게 불행은 태초처럼 오래된 것이겠으나 – 최초의 나의 기억은 엄마가 집에 없다. 집에 없다. 없다. 방이 넓다. 시간이 아득하게 멀다. 햇빛이 너무 노랗다. 그리고 밝다. 심심하다. 그래서 울었다에서 시작한다 – 불행이라는 이름으로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다.

부드럽고 따스하며 아무런 의무와 규율이 없던 집과 자유롭게 뛰어놀던 골목으로 부터 강제로 격리된 여덟살박이는 어느 봄날 책상과 걸상이라는 생경하고 강제된 틀 속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게 책과 공책 그리고 연필이라는 혐오스런 것들이 배급되었다.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하고 지루한 시간동안 책상에 묶이고 의자 위에 결박된 채, 바람결에 스쳐지나는 꽃과 친구의 이름들을 연필로 낚아채 종이 위에 정박시켜 나가는 철자의 규칙을 학교에선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글을 조립할 수도 판독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까막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단순한 철자에 대한 이해의 결핍 때문에 나는 다른 아이들은 겪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감내해야 했다. 지진아로 매도되었고, 담임의 멸시와 모욕을 지나서 무시해도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아이이자, 친구들의 조롱은 물론 따돌림을 받았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절망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사고 뭉치에 불과하다는 자기비판이 늘 가슴 속에 깃들어 있었다.

매일 부딪히는 좌절 속에서 글조차 읽지 못하고 맞이하는 수업시간이란 터무니없이 길고 지루할 수 밖에 없었고, 방과 후의 시간은 조금 나았을 뿐 내일에 대한 절망으로 고통스럽기는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어렸던 나로서는 세상이 나에게 보이는 적의와 하루하루 길게 늘어서 있는 시간들이 버거웠고, 하루 하루를 헤쳐나가는 방법이 없는 까닭에 세상에 대적하여 매일 사고를 쳤고, 친구들의 비웃음에 응당한 폭력을 행사하다가 얻어맞았다. 결국은 비굴하게 자신보다 약한 아이들만 괴롭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땐 수치스러웠다.

국민학교 2학년이 다 지나가던 어느 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불도 켜지 않고, 건너편 집에서 스며드는 어슴프레한 불빛 속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셨다.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지 못하니 유급을 시켜야겠다고 했다. 제발 글이라도 읽었으면 좋겠는데…, 도저히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며,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암담할 것이 뻔한 나의 앞날들에 대하여 애닲아 하시며 우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낮은 소리로 달래셨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하여, 이불 끝을 입 안에 밀어넣고 착한 아들이고 싶었는데, 잘난 아들이고 싶었는데 속으로 되뇌이며,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맞춰 울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유급없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유급을 면했던 것은 학년말 시험 때문이다. 담임은 나와 같은 학습부진아들이 학교와 학급 성적을 망쳐놓을까봐 시험 때면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2학년이 다가도록 받아쓰기나 산수시험과 같은 학급 자체로 치루는 시험 만 보았지, 일제고사와 같은 것을 치뤄본 적이 없다. 학년말 시험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담임은 시험을 보게 했다. 시험은 사지선다형이었는데,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담임이 문제를 읽어주었다. 비록 글을 읽진 못했지만, 정답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성적표가 나왔고, 집으로 가져갔다.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얼굴이 환하게 풀어지더니, 글도 읽을 줄 모르면서 어떻게 시험을 보았냐고 물었다.

“담임이 불러주면서 맞는 것에 똥구라미 치라구 했어. 그래서 그렇게 했지.”

아버지는 나의 성적표를 보고, “네 녀석이 분명 바보는 아니야. 단지 글을 읽지 못할 뿐이지.”라고 말씀하신 후, 새학년이 되자 공립학교의 성적이 좋은 아이들도 따라잡기 어렵다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여전히 나는 글을 읽지 못했다. 전학 온 나에게 호감을 가졌던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제발 저희 자식을 사람 만들어 주세요. 죽이시든 병신을 만드시든 선생님 원망은 않겠습니다.”하는 부탁을 받은 담임은 능력이 안되는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고, 숙제와 성적, 수업자세 등을 빌미로 냉혹하게 매질을 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글을 모르는 나는, 공책에 필기를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수업을 옛날 이야기처럼 듣거나, 창 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시간을 죽이는 일 밖에 할 일이 없었다.

예전 담임처럼 나를 무시했다면 차라리 나았다. 그러면 조용히 외로움 속으로 내려가, 문을 닫고 세상에 대하여 잠을 자거나, 무단 결석을 하고 동네 뒤의 인왕산에 올라가 파란 하늘을 보았을 것이다.

전의 담임은 일제고사 때면,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물론 학급 성적을 올리겠다는 얄팍한 술수였다. 학교가는 척, 아무도 모르게 60년대의 점포 옆에 있었던, 함석문을 넣어두는 곳에 책가방을 숨기고, 산으로 올라갔다. 가난한 민둥산에는 몸 하나 은밀하게 숨길 나무 그늘조차 없었고, 평일의 무료한 산에는 허기가 질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영천 쪽으로 내려가는 해골바위 등에서 벌어지는 굿판을 보거나, 허물어진 성벽을 따라 걷거나, 혼자 병정놀이를 하거나 무엇을 해도 심심했다. 홀로 산길을 걷다가, 넓은 바위에 벌렁 누워 낮의 햇빛에 조용히 그을고 있는 바위의 메마른 냄새를 맡았다. 바위 옆으로는 눈 높이로 자란 풀들이 바람에 눕거나, 한가하게 흔들렸다. 풀들은 글자를 몰라도 나름대로 끈질기게 살아가거나, 혹은 누군가 밟혀 죽을 것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살아있는 순간들은 평화로와 보였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움과 외로움을 감내하면서, 이를 악물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만 했다.

손을 활짝 벌리고 하늘을 보았다. 푸르다 못해 빛으로 꽉 들어찬 하늘은 잠시 까맣게 변했다. 하얀 구름이 쏴아 소리를 내며 눈가로 흘러가면, 하늘은 다시 푸른색으로 변했다. 햇빛 때문인지 눈에서는 눈꼽같은 눈물이 찔끔거렸다.

전학 간 학교의 담임은 그런 비루한 자유마저도, 어떤 불복종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하루 하루를 살아서, 죽어라고 가기 싫은 학교에 가, 내가 받은 보상이라고는, “넌 왜 사니?”하는 실존적인 힐난과 함께 몽둥이라는 가혹한 응징 외에는 없었다.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고, 간신히 살고 있던 나는, 가출이나 자살을 조금씩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실행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두려웠다.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씩 멀리 가보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보곤 했지만, 그때마다 견딜 수 없는 허기가 몰려 왔고,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러면서 조금씩 아팠다.

아픔이라는 것은 내게 있어서 우호적인 것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고, 하찮은 존재일 망정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3학년 2학기가 되면서부터 나의 오래된 질환, 위장병이 시작되었고, 미군부대에서 개구멍으로 어렵사리 구한 암포젤엠과 내용을 알 수 없는 알약을 매일 저녁 한움큼씩 먹었다. 복통으로 결석과 조퇴를 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육신에 깃들어 으르렁거리던 불순한 힘들이 점차 소멸됐고, 때로 나를 괴롭히던 두드러기마저 사라졌다. 극심한 통증이 그치면, 이부자리에 누워 창호지에 어린 오후의 고즈넉한 햇빛을 바라보았고, 멀리 골목 끝에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아무개야 노~올자”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 세상과 그만 싸우고 화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차분한 열정이 가슴 속에 차올랐는지도 모른다.

아마 볼거리에 걸려 쓰러졌던 때였을 것이다. 이틀동안 누워있었던 나는 오후의 햇살에 깨어나 어지러움을 안고 집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 텅빈 골목은 쨍소리가 날 정도로 조용했고, 가을 오후의 햇살에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어지러움 때문인지 몰라도 골목의 풍경은 전과 달랐다. 항상 놓여있던 낡은 폐차와 자갈더미, 시멘트가 깨어져 나가 생긴 웅덩이 모두 그대로였다. 골목이 끝나는 쪽에 아지랑이를 뚫고 나오는 것처럼 한 사람이 흔들리며 들어섰다. 기운이 없어서 그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때 아팠던 나의 유년의 날들이 투명한 햇빛 아래 ‘안녕!’하며 작별을 고했다.

너무 분명해서 나는 고개를 돌려 동네의 모든 곳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담벼락 위에 처진 철조망과 녹슨 가로대에 깃든 심술, 전봇대에 박혀 나의 옷이나 찢던 나쁜 못, 그리고 자살한 처녀의 집 문앞 쓰레기통 옆에 감돌던 실타래와 같은 어둠들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력하다는 것, 부분이 전체의 질서를 흔들지 못하며, 단지 그것들은 사물 전체의 미소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질서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사물의 부분들이 지닌 사소하고 유의미한 것들이 끝없이 이어진 세계 속에 나는 살고 있었고, 그것들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아팠던 유년의 날들이 끝나면서 삐뚤빼뚤했던 골목이 반듯해지고 담벼락에 박혀 나를 위협하던 깨진 유리병 조각들이 단순한 유리병 조각으로 자리를 잡았다. 세계의 혼돈과 유동성은 그 순간 제자리를 잡고 전체와 부분이라는 질서를 이루었던 것이다.

세계가 물활하고 나를 위협했던 것은 어린 내 속에 깃든 어린 삶의 약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은연 중에 사물들을 세상의 거대한 무의미 속에 밀어넣고, 다시 사물들과 허무한 이념들이 이룩해 놓은 정교한 질서와 권위에 묵묵히 복종하는 것을 비로소 알고 나는 햇볕이 노랗게 내려앉는 골목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어렸던 세계가 나로부터 빠져나가는 순간, 내가 느꼈던 것은, 그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끔찍한 동화의 끝에 맞이한 현실에 대한 허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고집스런 동화로 부터 현실의 무의미한 질서 속에 내가 내동댕이 쳐진 이후의 상황일 뿐이다.

병에서 회복을 한 나는 파리해진 얼굴로 등교를 했다.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을 때, 문득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글을 읽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그다지 신기했던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능숙하게 읽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자음과 모음 그리고 받침자를 인수분해하고 조합하며 틀리지 않게 글을 쓸 수 있었고, 3학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글을 읽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3학년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담임은 나에게 국어책의 마지막 쪽을 외우도록 했다. 담임은 내가 글을 외우는 것을 눈을 감고 들었고, 외우기를 마친 나에게 급우들은 박수를 쳤다.

나의 아픈 시절은 그 즈음에서 끝났을 것이다.

아픈 시절이 끝났다고 하지만 소외되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이 너무 길었던 셈이다. 그 시절동안 나의 육신에 가해진 매질과 가슴에 모멸로 다가왔던 외상들은 어린 나를 우울하게 했고, 아이들과 섞이려고 해도 나는 이야기도, 운동도, 노래도, 잘하지 못했다.

반면 성적은 금새 좋아졌고, 숙제를 안했다거나, 떠든다고 야단맞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어울리기 보다 홀로 종로통에 있던 삼류극장에 홀로 기어 들어가 영화를 보거나, 집으로 돌아와 적산가옥의 마루에 스며드는 도화지만한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늘 위장병에 시달렸다.

친구들과 뛰어놀아도, 시험을 잘보았다고 칭찬을 받아도, 본질적으로 불행했고, 외로웠다. 세상이 내게 보였던 적의가 쉽사리 사그러들 것이라고 나는 믿지 못했다. 파랑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실소를 했는데, 그렇게 멀리 찾아갈 만큼의 행복이라는 것의 가치를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인간이 맞이하는 불행과 고통이 늘 문제였을 뿐이다.

우울의 시간은 길었다. 이 사이에 남들이 말하는 사춘기가 지나갔는지 모른다. 사춘기라 해 봤자 어린 시절의 방황과 고통에 비해서 너무 간단한 유행병이라서 감기 몸살 정도로 알고 스쳐 지났는 지도 모른다.

우울이라고 하지만, 감수성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 시에서 본 한 구절에 가슴이 떨렸고, 전시회에 걸린 그림 속에서 가을 저녁의 슬픔과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悲歌처럼 고요한 슬픔이었다. 전시회에서 벗어났을 때, 경복궁의 뒷뜰에 떨어지는 늦가을의 지친 햇빛을 보면, 오히려 삶은 찬란한 슬픔을 따라 은빛 실루엣으로 오려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간병기와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간신히 알기 시작했다.

행복이라 하지만, 가슴 속에 차오르는 확실함이 아니라, 통속적인 것이었다. 타인의 불행이나 빈곤에 견주어 그나마 났다는 것을 인식하고, 억지춘향으로 그나마 나는 행복하다고 씨부리는 것이었고, 그것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이 아닌 외적인 기준에 입각한 것이었다.

주변의 뼈저린 가난에 비하여 그럭저럭 살고 있다는 것, 가족들이 그나마 화목하게 지내기 위하여 돈벌이나 학업이라는 자신의 의무범위 내에서 충실한 동시에, 방임 속에서 서로의 신경을 거슬리는 잔소리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누가 보아도 그럴듯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만이겠으나, 훌륭한 사람이나, 출세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뭐가 되기 위해서 청춘이나 모든 것을 거는 짓을 할 생각도 없었다. 보통 사람 정도로 사는 대신, 커다란 서가가 있고, 때로 영화관이나 전시회를 갈 수 있을 정도의 소박한 삶에 만족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바램은 이미 나의 생활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된 나는,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전교 20등 안에 들었다. 공부 꽤나 하는 놈들이 과외를 하고 문제지를 푸는 동안, 아이들과 오징어다리를 하거나, 문학전집의 ㅈ자로 시작하는 작가들의 소설을 끝내고 ㅊ자로 시작하는 작가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 시인의 싯귀를 읽고 까맣게 익어가는 창 밖의 밤에 설레기도 했다.

위장병에 시달리는 나를 위하여 어머니는 간혹 학교로 왔다. 조퇴를 시키고 교문을 나서며, 아직도 배가 아프냐고 물으셨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라면, “나도 학교 다닐 때 교문만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안 아프더라.”며 함께 영화나 보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어머니의 자유분방함과 소소한 결함은 늘 당신께 깃들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거짓말같은 것은 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엄하긴 했어도, 미술전시회나 좋은 영화, 값싸게 갈 수 있는 음악회를 늘 준비해 주었고, 가끔은 당신께서 읽지도 않을 전집류나 듣지도 않을 전축과 음반들을 사오셨다. 나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챙겼고 즐겼다. 때문에 한국문학전집은 물론 세익스피어의 사대비극을 지나 소네트까지 다 읽었으며,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이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로 절명하는 것과 단조로운 스페인 무곡 볼레로를 나선형 무한반복을 통하여 모든 악기들을 모아 천상까지 오케스트레이션을 한 후 짜자자잔 단번에 무너뜨리는 그 피날레를 즐겼다.

불행하지 않았다. 나의 헛된 행복감 속으로 약간의 괴로움과 지겨움이 간혹 끼어들기는 했지만, 대체로 나의 생활은 고요하고 평화스러웠다.

하지만 친구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포에서 서강 사이를 둘러싼 가난들, 오물과 하수가 까맣게 뒤섞이는 개천변에 베니다판과 루핑을 얹어 지은 하꼬방들과, 골목마다 늘어선 작부집들, 넝마주의들이 노린내를 뿜어내며 길거리에서 잡아온 개를 까맣게 그을리던 와우산 아래의 공터, 화물열차가 지나는 철길 가에 떠다니는 연탄분진들 속에 가라앉은 변두리의 생활들을 목도하면서도, 왜 그리 지지리 궁상이나며, 외면했을 뿐이다. 가난과 누추란 나의 것이 아니라며, 나름대로 풍성하고 우아한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나의 청춘에 와 닿는 무료한 시간의 비늘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 대학이나 갈 것이고, 조금은 나아지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나날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 몇 놈은 학교를 떴다. 삼수를 했던 친구는 한학년 빠른 여자친구와 계속 사귀기 위하여 검정고시를 치루고 같은 해에 대학을 가야만 한다며 자퇴를 했고, 또 한명은 “너는 학교에 다녀보았자 대학가기는 틀렸다. 그러니 괜한 헛고생 말고 그만 다녀라”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또 몇명은 학내 폭력 어쩌고 저쩌고 하며 퇴학을 당했다.

학교란 제도권이었다. 특히 군국화한 유신 정권 아래에서 학교들은 일정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혐오스러울 정도로 병영화하고 비루한 정권의 시녀로 전락했으면서도, 강고한 독재권력의 일부를 위임받거나 배워 학생과 심지어는 선생들에게도 파쇼를 행했다. 애정으로 학생들을 끌어안고, 키워 갈 도덕적 능력은 도무지 부재했다. 어떻게 부역을 했으면 그런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학교를 잘 맡아달라고 일본놈들에게 적산학교를 불하받은 우리 학교 교장에겐, 학생이란 자라나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예비고사 합격율이나 일류대학 진학율 기록에 강제 동원되어야 할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는 학생들을 솎아냈다.

학교 당국과 선생들은 근엄한 판관으로 군림했고, 너희들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고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곤 했다. 간혹 보란듯이 고등학교 만이라도 졸업하고 싶다는 나의 친구를 황량한 길거리로 내몰았다. 폭력에 가담한 친구에게 저간의 사정이나 반성문 한장도 요구하지 않고, 정학이라는 수순도 없이, 성적표에 적혀진 형편없는 숫자들을 보고 좋은 놈 나쁜 놈을 임의 판단하고 가차없이 퇴학을 시켰고, 함께 싸움을 한 학생회 녀석들은 피해자라는 명분으로 교정을 어슬렁거릴 수 있도록 했다. 놈들은 홍위병이거나 친위대 혹은 후레이각세이(不令學生)를 잡는 앞잡이였다. 친구들이 교모와 교복 윗저고리를 벗어던지고 교문을 나가는 모습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기는 했어도, 나는 분노하지 않았다. 설령 분노했다고 하더라도, 나의 분노는 단지 불만이거나 아니면 지랄에 불과했다.

청춘에 다가온 시간들의 무한한 소용돌이에 나는 무감각했는지도 모른다. 고3이 되자, 한놈이 음독자살을 했고, 건강한 탓에 다시 살아났다. 나는 놈에게 자살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에 자살할 땐 수면제의 양을 40알 정도로 늘리고 약효를 증폭시킬 수 있도록 소주와 함께 복용하라고 했다. 놈은 고맙다며 “다음 번 자살할 땐 네 놈의 이름을 반드시 유서에 남겨주겠다”고 다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와 함께 우반에 올라간 유일한 친구녀석은 “견딜 수가 없다.”, “미치겠다.”라고 니코틴에 찌든 말을 남긴 후 사라졌다. 놈을 찾았을 때, 노이로제로 정신병동에 놈은 갇혀 있었다.

노이로제를 스트레스 정도로 알았던 나는 퇴계로에 있는 병원으로 면회를 갔다. 맨 윗층에 있다는 병동을 찾을 수 없어 몇번이나 뱅뱅 돈 나는 맨 윗층, 한쪽 구석의 반층짜리 계단을 찾았고,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두드렸다. 명함 두장 크기의 밖을 내다보는 구멍이 열렸고, 눈동자가 한동안 나를 바라다 본 후, 보호자가 아니면 면회는 안된다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탁하고 닫혔다. 그 순간 노이로제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정신병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2학기가 시작되자, 3개월 쯤 그곳에서 보낸, 놈은 근육이완제가 잔뜩 처방된 약을 먹고, 촛점이 풀린 눈으로 어슬렁어슬렁 교정으로 돌아왔다. 놈의 눈을 보는 순간, 놈이 더 이상 공부도, 대학에 진학할 수도 없을 것을 직감했다.

놈은 1학년 초만 해도 나와 반에서 일 이등을 놓고 누가 더 잘하느냐 했던 놈이었고, 나라면 몰라도 놈이라면 서울대는 너끈히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놈은 의자에 마른걸레처럼 앉아 초점도 잡히지 않는 눈으로 칠판을 보며, 하루와 하루를 지내는 일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놈에게 무엇이 노이로제에 걸리게 했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단지 “이젠 괜찮냐?”라고 한 마디를 던진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왜 자살을 시도했고, 노이로제가 무엇인지 나는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놈들의 아픔과 질병의 이유들이 말할 수 없게 아득할 것이었기에, 우정의 이름으로 놈을 괴롭히기 보다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단지 방과 후 교정의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혹은 친구의 좁은 방 안에서 가만히 녀석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키들거렸을 뿐이다.

“정신병동에선 담배를 피울 수 없잖아?”

풀린 초점을 잡기 위하여 놈은 나를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놈의 촛점은 나의 얼굴을 투과한 어느 지점에 잡혀 있어서, 나를 보고 있는 건지 모호하고, 광기같은 것에 들떠있는 듯 보였다. 목소리는 느릿하여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거짓말같지는 않았다.

“그 아줌마의 남편이, 병원과 잘 아는지, 담배가 들어오곤 했어. 아줌마가, 어느 날, 그랬어. 담배피우지? 그렇다고 했어. 그랬더니, 여자 화장실로, 끌구 가서, 담배를 줬어. 좁은 똥깐에서, 우리는 마주보며, 담배를 피웠어. 그리구, 키스해 달라고 하더군. 매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우리는 키스를 했어.”
“가슴은 만져봤어?”
“물론!”
“끝내주는데…, 그럼 아랫도리도…?”
“응!”
“그 짓은?”
“안했어. 아니, 못했다는 것이 맞아.”
“왜?”
“미친 년이라지만, 거기까지 미치진, 않은 모양이야. 그리고 또 다른, 미친 놈이, 병동에, 들어왔어. 그 놈이 마음에 들었나봐. 나를 버렸어. 다음부터는 그 새끼와 담배를 피웠지. 화냥년이 양심은 있는지, 담배 한까치 씩은 던져주더군.”
“거기가 좋냐?”
“거기나, 학교나, 매한가지지.”

2학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책이나 읽고, 공부는 하지 않았다. 공부를 한답시고, 학교 뒤의 사설 도서관에 자리를 빌렸다. 도서실 측에서는 2층에 자리를 내주었다.

좁고 답답한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 공부를 할 준비를 하는데, “아쭈구리, 공부하려고?”하고 누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다보니 옆반 녀석이었다.

“이 자리 영 형편없군. 나도 며칠 전부터 여기를 들락거렸는데, 오늘보니 옥상에 명당이 있더라구.”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시원했다. 옥탑방에 잔류하고 있는 하급생들을 몰아내고, 선배로써 면학분위기를 조성한다는 핑게로 도서실 내의 책상을 뒤져 포르노 잡지와 담배를 빼앗았다. 그리고 가게에서 소주를 몇병 사다 서랍 속에 질러놓았다.

옥탑방에서 걸상을 밖으로 내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옆 반이라고 얼굴 만 알고 지내다 서로의 이름을 나눴다.

“나 도사다. 민재. 알지?”
“알다마다. 8반이지? 난 해골. 명훈이다. 박명훈.”

언덕 아래 서강 위로 내습하는 가을 저녁을 보았다. 앞 날에 대하여 아무 기대할 것 없었던 나날들 속으로 스며드는 저녁 노을은 웅장하다 못해 처참한 빛으로 가득했고, 빛이 자지러지면 귀뚜라미가 밤을 갉아대며 울었다.

아무 말없이 소주병을 돌려가며 마셨다. 유리병 주둥이를 통해 울컥 울컥 넘어오는 소주의 맛은 비릿했다. 취하지도 않는 몇모금의 술을 마시고, 옥상 위에 널린 전선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은 나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왜 널 건들면 골로 가는거냐? 전에 한 놈이 너 잘못 건드렸다가 싹싹 빌었다는 전설이 있던데?”
“쪽 팔리는데, 친구들이 손 좀 봐준 모양이야. 너 ‘몽따다’ 알지?”
“모르는 놈이 어딨냐? 만희하고 그런 애들이…”
“내가 거기 맴버다. 그것도 특별회원. 하지만 쌈같은 것은 숨차고 무서워서 못해. 난 마스코트일 뿐이지. 짜식들은 자기가 누구한테 맞았다면, 쪽 팔려서 찍소리도 못하지만, 어느 놈이 날 건드리면 자신들의 마스코트에 기즈를 냈다고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피 작살을 내줄 놈들이야. 그 뿐이야.”

친구들은 나에게 타락했다고 했다. 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랐던 것처럼, 타락이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뜻하는지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모른다. 차라리 세상을 포옹하기 위해서는 삶의 바닥 끝까지 내려가 인간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치욕과 절망과 쾌락을 느껴야만 된다는 의무감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 떠내려 갈 용기가 없었던 만큼, 늘 멈추어 섰고, 그에 따라 가슴은 메말라 갔다.

친구는 나에게 너무 타락해서 외면상 순수 밖에 들여다보이지 않는 그런 놈이라고 했다. 절망하지도 않고, 우정에 대해서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들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타락이라면 그것들로부터 나를 건져올릴 방법은 없었다.

옥상에서 맞이하는 땅거미와 어두운 바람 속에 깃든 가을의 메마른 먼지내음 때문에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육십촉의 전구빛이 아랫 동네의 골목길 전봇대의 발등을 비추고 있었고, 도서관 아래 작부집에서 주전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옥상까지 올라왔다.

무슨 슬프거나 힘든 일이 사람들을 술에 취하게 하고, 또 터지도록 노래부르게 하는 지? 그들의 뜨거운 애환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가을바람이 차갑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소주병에 남은 반모금의 술을 마시고 담배 꽁초를 주둥이에 밀어넣은 다음, 도서실 책상 위에 널려있던 책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고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 해 겨울로 접어드는 시점에 예비고사를 보고, 겨울에 본고사를 치뤘다. 졸업을 했고, 졸업식날 나누어준 적금을 깨서 사먹은 술에서 깨어날 무렵, 대학에 간신히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학문에 뜻이 없었던 내가 대학에 갈 뚜렷한 이유란 없었다. 직장을 구하여 일을 하기 보단, 4년동안 놈팽이처럼 놀다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기에 대학에 갔을 뿐이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배를 타고 싶었다. 대양의 막막함과 무료함에 지칠 무렵, 뚜렷한 색깔로 다가오는 섬과 산맥들 아래로 부두와 저문 바다 저편에 희미한 수은등 사이로 떠오르는 포구, 그 대지의 땅냄새를 맞이하는 선원을 생각했다.

단일한 푸르름으로 꽉차 수평선 이외에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단일한 심심함, 가난한 항구의 한 켠에 있을 술집과 이국의 골목을 채운 매혹적이고도 값싼 매춘부들을 생각했다. 그 곳에서 타락과 세상의 끝자락을 맞이할 것이라는 미적지근한 기대감에, 안락한 가족과 같은 것은 포기해도 좋다고 어린시절 부터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해양대학교를 가지 못하고, 땅 위에 남았다. 7번 버스를 타고 서울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에 있는 학교를 갔다 돌아오곤 했다. 그 사이 사이로 여자를 사귀기도 했다. 사귀어야 할 이유나 여자에 대한 갈증은 없었지만, 대학에 들어가자 여자를 사귀어야 한다고 했다. 외삼촌과 친척들이 여자친구를 만날 때 쓰라고 돈을 주었고, 책을 사는 것 말고는 옷을 사거나 군것질을 하는 것에 도통 취미가 없었기에 돈을 쓸 데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술을 마셨기에 술에 취해 객기를 부리는 것에도 심드렁했다. 나의 호주머니 속에는 돈이 넘쳤다.

그래서 미팅에 몇번 나갔고, 더듬거리며 간신히 여자 하나를 사귀었다. 그리고 몇몇의 여자는 내가 얼굴이 잘생기고 그럴듯한 대학을 다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쓸모가 없다는 것과 아무런 매력이 없는 것을 알았는지 금새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때쯤 나는 내가 앓고 있던 질병이, 유사 실존적 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실존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냥 이 세상에 내가 있다는 것, 그 정도다. 이성적 합리성이나 도덕율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사태를 윤리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쪽에서 호도하려고 하여도 나의 혀는 늘 ‘놀고 있네!’라고 비웃고 나의 감정은 메말라 있다는 것이다.

질병은 오래 묵은 것이다. 우정이라는 것이 고착된 의미와 뚜렷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중학교 때, 친구가 보고 싶어 죽겠는데, 그 친구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를 귀찮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남아돌던 나는 우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고, 명상의 끝에 사람이라는 동물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걸 필요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우정이란 아무 관계도 없던 두 놈이 어떤 자리에서 만나 서로 얼굴을 익히고 그러다가 낄낄거리다가, 상대에 대하여 아무 흥미가 없거나, 혹은 감정적인 골이 생기면 대판 싸우고 헤어지는 것일 뿐, 공맹시절처럼 우정이라는 이름에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싸이코이거나 하나의 협잡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우정이라는 것을 포기했다. 함께 아름다운 낱말에 깃들었던 다양한 색조는, 빌어먹게도 중학교 때 잿빛으로 바래고 말았다.

세상살이가 재미가 없었다. 반면 우정이나 사랑 등 애증을 수반되지 않았기에, 남들처럼 괴로워 하거나 희열에 들뜨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 번잡스러운 것에 매달리기 보다, 친구가 오면 친구고, 가면 가나보다 하는 식으로 살았고, 사랑도 이하동문이었다.

때때로 산문정신이라는 말로, 詩나 노래에 반하는 말들을 내가 주절거렸다면, 내 가슴에는 노래를 불러야 할 열정이 없거나 쓴 소주를 마시며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어야 할 괴로움이 없었던 탓이다.

이런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반학기가 지나자, 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보통 땜통, 빤쓰, 해골, 무대 등이 판을 치는 학교에서 그런 멋진 별명을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에 대하여 의아해 했고, 왜 나보고 도사라고 부르냐고 물었지만, 친구들의 답변은 누군가 도사라고 했고 그후 애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면 별명을 얻게 된 후, 친구들은 정말 도사님께 세상만사 다 알기라도 하는 냥 잡다한 것들을 물었고 심지어는 인생상담도 했다.

“(학교에서) 담치기하는데 가장 좋은 장소가 어디냐?”, “어디가면 포르노 잡지를 가장 싸게 살 수 있느냐?”, “담배 피우는 데 (화장실말고) 좋은 곳 없냐?” 심지어는 “야 애들이 소음순 어쩌고 저쩌고 하는 데 그게 뭐냐?” 자살할 때 수면제를 몇알 정도 먹는 것이 좋겠느냐는 등속을 물었다.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묻는 것들을 대충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너도 괴로움이라는 것이 있냐?”고 친구 놈이 물었고, 그것이 무슨 말이지 하고 생각하다가 도사라는 의미를 알았다. 나에겐 속세가 없었다. 괴로움이 없었고, 단지 좀 피곤할 뿐이며, 외로움도 없었고 좀 심심할 뿐이라는 것이다.

놈들은 늘 평온하고 조용하며, 가끔 고삐리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허무한 말들을 미소를 지으며 툭툭 던지곤 했던 나에게 별명을 그렇게 지어주었던 것 같다.

반면 놈들은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여자를 만나도 내 가슴은 그다지 뛰지 않았다. 사춘기를 그냥 건너 뛴 나는, 여자의 손을 잡거나, 따스한 속살이나 촉촉한 입술에 대한 갈증이 없었다.

아이였거나, 너무 늙어 육체적인 욕구를 상실한 그런 놈이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금욕적인 생활에 너무 길들여져 있는지도 몰랐다. 잠을 조금 잤고, 음식을 적게 먹었고, 술도 입에 대지 않다가 가끔씩 폭음을 했을 뿐이다. 우정에 대해서 그랬듯이 사랑이라는 것에 아무 기대도 없었다. 나를 향하여 동그란 얼굴을 만들고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는 여자 아이들이 신기했다.

여자들은 너무 어렸다. 육신은 무르익었으나, 연애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타인의 사랑이나 받겠다고 예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답답한 다방과 같은 곳에서 공교롭고 진부한 언사들이나 연발하고, 더 이상 한발자국도 못나가는 것이 그들의 연애였다.

하지만 나는 더 했다. 여자애는 몇번 나를 만난 끝에 그냥 귀엽게 자라 아무 생각도 없고, 그럭저럭 생겼으니 심심한데 데리고 다녀도 챙피하지 않다는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 속셈이 나쁠 것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사랑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 몰랐다. 물론 껴안아 주고, 입을 맞추고, 같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 이상은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여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를 몇번이나 읽었다. 당신, 구름, 수평선, 갈매기 등의 몹시 한정된 단어로 쓴 시였다. 유치했고, 내용도 없었다. 무엇 때문에 편지를 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하거나 하는 그런 증거는 편지 속에 없었기에 얘가 좀 할 일이 없어서 낙서를 했나 싶었다. 휴지통에 집어던지려다 혹시 모르니 하고 책상서랍에 갈무리를 했다.

다음에 여자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어보았냐고 물었다. 물론 읽었다고 했다. 그러자 노래의 가사라며 딴청을 피웠다. 노래가사는 아니었을테지만, 쑥스러울까봐 어딘가에서 들은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아무튼 내 편지에 답장을 해주어야 돼.”

아무 내용없는 편지에 어떻게 답장을 할 수 있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쓰겠다고 했다. 아마 그것이 연애편지라고 할 수 없는 연애편지를 쓰게 된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편지지를 꺼내놓고 첫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읽고 있던 ‘말테의 수기’와 같은, 드럽게 따분한 문체로 편지를 썼다. 집 앞의 골목과 늦은 봄의 따분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장미의 아름다움과 인생과 사랑에 대해서 뭣도 모르는 자식이 한자를 듬뿍 섞어 지랄같은 서사적인 편지를 썼다.편지는 하염없이 길어서 모나미 볼펜으로 빼곡히 3장을 썼다. 첫 연애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부쳤고, 하도 지랄같은 내용이어서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다.

다음에 만나자, “너처럼 쓴 편지는 처음 보았어.”라고 말했다.

그러면 다른 남자의 편지는 많이 받아보았느냐고 물었다.

“너는 우리가 자신이 받은 편지만 읽는다고 생각하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야 다들 자신에게 온 편지를 은근히 누구에겐가 보여주고 싶어해.”
“그래서?”
“네 편지를 읽어 본 친구들이 한번 너를 보고 싶다고 하더군.”

그 소리를 듣고 마치 교내 백일장에서 장려상이라도 탄 기분이었지만, 그 후 계속된 친구들의 이야기라며 떠들어대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편지의 장수가 3장이나 된다고 그렇게 좋아할 필요가 없다고, 그 편지는 단지 숙녀에 대한 예의바른 경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애편지를 쓸 줄 알게 된 나는 심심하면 편지를 쓰곤 했다. 편지를 쓰면서 여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감정은 아니었다. 심심해서 보고 싶는 것인지, 보고 싶어서 심심한 것인지 잘 모를 정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학교에서 축제가 열렸고, 라일락 향기가 뚝뚝 떨어지는 교정에서 빌어먹게도 여자의 친구들을 만나고 말았다. 그녀들은 둥그런 테이블로 자신들의 남자를 데려다 앉히고, 생글생글 웃으며, 이런저런 심문을 했다. 수줍음이 많아 폼을 잡고 말을 하는 것이 잼병인 나는, 그들의 집요한 심문이 오히려 편했다. 고등학교 때 여자 많이 사귀었죠?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수미를 사랑해요? 호호호. 왜 그 학과에 들어가셨어요? 앞으로 뭘 하실거예요?

여자에 대해서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사귈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것은 어려서 잘 모르겠다. 그 단어는 무겁다. 좋아한다는 정도로 그치면 될 것 같다. 아니면 앞 날을 기다려 본다면 그렇게 될 것 같다. 성적도 안좋고 갈 곳도 없고 해서 갔다. 뭐 공부하려고 대학에 간 것도 아니고 하니 아무 데나 간 것 용서해달라. 짤막하게 대답하며, 질문의 화살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그때, 한 여자가 저음으로 물었다.

“책 많이 읽으셨죠?” 그 목소리에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다른 책 많이 읽은 사람에게 드러내는 관심과 적개심이 깃들어 있었다. 책을 빼놓고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던 나는 “그 쪽도 많이 읽으신 모양이네요?” 반문을 했다. 그러자 얼마나 읽었냐고 물었다. 일주일에 한권, 팔년을 줄곧 읽었으면, 아무리 못해도 사백권은 되지 않겠냐고 했다. 제일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아무개 작가의 책을 읽어보았냐고 물었다. 나의 책은 ‘적지와 왕국’이거나 ‘지상의 양식’이라고 했고, 아무개 작가의 책은 무엇 무엇을 읽었고, 다음 책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대학생이기 때문에 주지주의적이라고 다 문학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말씀 제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수미는 어째서 민재씨가 책과 담을 쌓고 사는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나는 본래 멍청해서, 스스로의 머리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기생충같이 타인의 생각이나 파 먹고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읽어도 다른 아이들의 머리를 쫓아갈 수 없었다. 그러니 수미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했다.

여자는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농담이나 하고 슬픔이나 우울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곱상한 얼굴이라 복잡한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공부나 하고 과외나 받으며 대학에 들어온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았다며 재잘거렸다.

하긴 나는 늘 그랬다. 국민학교 1~3학년 그 아팠던 때에도 모두 내가 아무런 걱정도 없고 늘 편안하며 축복받은 것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 나의 외모의 탓인지도 모른다.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그 다음날에도 축제에 불려갔다. 밤이 되고 고고파티가 벌어졌다. 나는 춤을 추지 못했다. 내가 춤을 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여자는 기쁨에 들떠 왜 춤을 못추느냐고 추궁했다.

그동안 여자를 만나면서 내가 느낀 점은, 내가 못생겼고, 머리가 나쁘거나, 몹시 순진하며, 학교에서 공부 밖에 모르는 범생이고, 무식하고, 달리기도 잘못하고 그런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저런 이러저런 변명꺼리를 둘러대다가, “그런데, 내가 춤을 못추는 것에 대하여 왜 그렇게 신나하는거야?”하고 물었다. 여자는 문득 놀라 주춤거렸다.

“여태까지는 내가 너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 생각이 바뀐 모양이지?”

“아니 무슨 생각?”

“그냥 대충 시간 떼우기 용으로 나를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지. 이제 내가 좀 신경 쓰이기 시작한 모양이지? 그래서 나를 깍아내려 예전처럼 네게 아무 것도 아닌 놈으로 만들고, 심심풀이 땅콩식으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겠지?”

여자는 긍정도 부정도 안했다.

“잘 들어둬. 아직은 나에게도 너는 그냥 만나는 애일 뿐이야. 그리고 나보다 나이가 한살 많다는 그따위 유치한 생각은 집어치우는 것이 좋을거야. 자꾸 그따위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밖에 더 되겠어?”

축제가 끝나고 난 뒤, 여자와 나는 좀 소원해졌다. 그러나 나로서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뜨거운 사랑을 향하여 모험을 떠난 여자들이 만난 나는, 아무런 열정도 없이 조용히 앉아 그녀들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또 다른 세계에 갇혀 자신 만을 탐하고 있는 자였으니까.

그래서 여자들은 조용히 절망하고 나를 떠났고, 여자들이 떠난 후 나는 가끔씩 그녀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억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사랑했던 추억 만을 만들었던 것이다.

징집영장을 받아들고 내일쯤이나 휴학계를 내야겠다고 할 즈음에 친구들은 졸업여행을 떠났고, 그 날 저녁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입영일자를 모레 앞두고 학교 건너편에 서점 이층에 임시 학적계가 개설되어 간신히 휴학계를 내고 삭발을 하러 이발소에 갈 즈음에, “이 새끼, 아무 소리도 안하고 튈려고 했지?”하며 설악산의 단풍내음을 풍기며 졸업여행을 끝낸 친구들이 몰려왔다.

“여자들은 다 정리했어?’
“언제 나한테 여자나 있었나?”
“그 많던 여자들은?”
“멋진 놈과 눈 맞아 달아났다. 뜳냐?”
“불쌍한 인생이군. 안슬프냐?”
“슬퍼서 미치겠다.”

박정희의 국장일인 11월 3일 입대했다. 겨울이 한참 남은 11월초였지만, 스산한 정국을 때문인지 은행잎이 지기도 전에 얼음이 얼었다. 십이십이 사태가 지나고, 가파른 겨울 속으로 먼지처럼 소문들이 뒹구는 신작로를 지나 자대에 배치를 받은 나는 삼사출신의 중대장에게 불려갔다.

“너 한자 잘 알지?”

쪼인터로 워커발이 날아올 짧은 시간동안 예와 아니오를 선택해야 했다. “예”라고 했다.

“에이 X같은 새끼들, 맨날 전통을 날리고 지랄이야.”하며 철필로 등사기를 긁어 예하부대에 날린 삼군사령관의 전통을 나에게 주었다.

전통의 상단에는 증산 수출 건설이 쓰여 있었고, 그 밑으로 ‘이가은는’을 빼고 한자로 빽빽했다. 그 한자들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충용, 건안, 욱일 등 쇼와 시절의 군국주의 한자들이 섞여 있어서 생경했다.

가파른 시절이라서 그런지, 사흘들이로 전통이 날라왔고, 일조점호 전에 불려가 한자 위에 한글로 독음을 달았다.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대충 때려잡아 음을 달았다. 점호 때 중대장이 그것을 읽었고, 내 멋대로 음을 단 전통을 읽는 중대장의 목소리를 들으면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신년초부터 연대본부의 이전이 있다고, 산중턱을 잘라내라고 나에게 부삽이 배급되었고, 겨울동안 사역을 나갔다.

중식을 먹고 겨울 햇빛 아래 어깨를 녹이거나, 귀대하는 길에 개울가에 부삽을 깔고 앉아 땅거미가 남은 햇빛을 제치고 겨울바람과 함께 다가오는 것을 보며, 서울에 놓고 온 여자를 생각했다. 그제서야 내가 여자를 정말로 사랑했다는 것을 간신히 알고 말았다.

늘 나는 뒤늦게 깨닫곤 했다. 겨우내내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편지를 쓰지 못했다. 나의 사랑은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한 채 늘 시들고 말았다.

해동이 될 무렵, 뭉뚝해진 산 위에 막사가 지어졌다.

연대장은 뒷짐을 지고 돌맹이가 삐죽삐죽 나온 연병장을 내려다 보며, 군기가 빠진 예하 부대 졸병새끼들을 위하여 군기대를 설치하면 좋겠다고 했다. 군기대가 설치되고 얼마 안되어 광주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그 후 전두환이라는 놈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뻔하게 되자 전통은 줄었고, 사역과 훈련을 하며 보냈다. 하지만 아무도 그립지 않았고, 나는 견장을 찼고 라면을 끓여 먹다 그만 제대를 했다.

4학년으로 복학을 했다. 돌아간 80년대의 교정은 내가 다니던 70년대의 학교와 사뭇 달랐다. 서관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본 여학생의 얇은 면바지 위로 팬티자욱이 드러났고 엉덩이가 비칠듯했다. 그토록 얇은 바지를 여자들이 수치심도 느끼지 못한 채 입고 다닌다는 것에 놀랐다. 더 이상 군복에 검정물을 들인 스몰복을 입은 학생들은 없었다. 서로 사귄다는 소문이 나고 헤어지면 여자나 남자나 좋을 것이 없다고 사귀는 것을 숨겼던 유신치하의 70년대의 구부능선을 지나고 광주사태를 지나면서 치약을 눈아래 바르고 남녀 함께 스크럼을 짜고 최루탄의 눈물을 감내하며 세월을 보낸 그들은 남녀 구분없이 손을 잡거나 서로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린 채 교정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말세라도 본 심정으로 머나먼 칠십년대에서 불쑥 팔십년대로 들어온 나는, 처음으로 외로움같은 것을 느꼈다. 그 외로움은 마치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서울에서 경주까지 갈 때 느꼈던 그것과 같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 나는 더 이상 친구사귀기를 포기했다. 우반이랍시고 공부 밖에 모르는 자식들은 밥맛이었고 놈들 또한 이제 성적 상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는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교실에서 나가 이른바 똘반으로 가서 친구를 불러 놀거나, 교실 앞 교사를 개축한답시고 몇년째 놓여 있던 자갈무더기 위로 올라가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는 공부를 못한다고 자퇴를 권고 받았다고 했다. 친구는 키도 크고 착했지만 싸움은 누구보다 잘했다. 놈이 싸우는 모습을 멀리에서 프로야구를 보듯 보곤 했다. 놈은 우아하게 싸웠다, 슈가레이 레너드처럼. 놈은 소리치지도 않았다. 주먹으로 어르지도 않았다. 놈은 적을 향하여 단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참 매력적이었다. 놈의 싸움을 보면서 우리는 소리쳤다, 웃었다! 라고. 상대편이 펀치를 날리고 발길질을 해대도 놈은 별 움직임없이 그것들을 피해내고, 한두번의 힘도 들이지 않은 것 같은 주먹을 날린 후 돌아서면, 상대편은 늘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면 놈은 늘 상대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등을 한번 쳐 주곤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난 후 우리는 놈의 무용담을 자기가 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몇번이고 몇번이고 이야기하곤 했다.

“엄마가 고등학교 만이라도 졸업을 하라고 했는데… 그래서 담임한테 공부는 잘할 수 없지만, 조용히 학교를 다닌다고… 좀 봐달구 빌었는데도… 그만 두라고… 하더군.”

놈은 울었다. 나는 놈에게 자퇴를 하게 된다면, 교문에 있다가 “짤막이 그 새끼가 나오면 야이 x새끼야 하고 아구창을 날려버려 씨팔”하며 운동장을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수학여행이 결정된 어느 날, 돌무더기에 누워 봄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나에게 놈이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사테를 직감한 나는 놈의 손을 꽉쥐었다.

누운 손을 잡아 나를 일으켜 세운 후, “너는 공부 잘했으니까 좋은 대학가라. 나를 보면 아는 척하고…”놈은 조용히 내 어깨를 밀듯이 주먹으로 치고 미소를 지은 후 교문을 나갔다.

야비한 학교가 싫었다. 자기만 잘먹고 잘살겠다며 공부만 하는 놈들의 꼬라지도 보기 싫었다. 담임에게 집이 가난한 관계로 수학여행을 갈 수 없다고 했다.

“난 너같은 놈을 잘 알아. 고일 일학기 때까지 성적은 찬란하더군. 아마 재수 삼수 안하고 뺑뺑이로 들어온 놈 중에 너보다 성적이 좋은 놈은 없을거야. 그런데 갑자기 이학기가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더군. 아무리 우반이라지만 월말고사 성적이 반에서 52등이 뭐냐? 그 성적이면 똘반에서 중간도 못해. 얼굴보면 나쁜 짓은 안할 것 같구. 너 염세적인 것인가 그런 거 아냐?”

염세적 어쩌구 저쩌구에 웃을 뻔 했으나, 가까스로 참고 “아닙니다. 공부를 해보려고 해도 잘안됩니다. 미치겠습니다.”라고 했다.

다음 날 담임이 나를 불렀다.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고 했다.

“돈이 없어 이 짜식아? 남들 다 수학 여행을 간 서울에서 혼자 뭐하려고 그러는 거야?”

둘러댄다고 씨부린 것이 담임에게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우리 반에 아는 놈이 하나도 없고 수학여행 많이 가봤는데 재미도 없구…”

담임은 몽둥이로 내 머리를 치며,”이 짜식 형편없는 짜식이네. 그렇다고 소중한 추억이 될 수학여행을 안가?”라며 소리쳤다.

할 수 없이 용산역에서 육이오 때 피난민을 실은 것 같은 낡아빠진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철커덩, 철거덩 영등포를 지나고 안양쯤 당도하자 우리반이 탄 객차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녀석들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몰렸다. 또 놈들에게서 떨궈져 나갈까 싶어 중심의 외곽으로 성적이 처지는 놈들이 달라붙어 밀리고 엉키고 하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병신같은 새끼들!

객차의 입구 쪽에 앉아 있었는데, 다들 공부 꽤나 한다는 놈들쪽으로 떠났기 때문에 담임과 마주보이는 자리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완행열차는 무지하게 느릿느릿 달리고, 시간의 한쪽 끝을 담벼락에 껌이라도 붙여놓았는지, 시간은 끈적거리며 도무지 흘러갈 생각을 안했다.

1학년 때의 친구나 만나야겠다고, 객차 사이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담임이 불러세웠다.

“너! 다른 곳으로 가면 죽을 줄 알어. 다른 반 기웃거리지 말고 이번 기회에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리란 말이야. 저 놈들 봐라. 금새 서로 어울려 놀지 않냐?”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자리에 앉았던 놈들이 잠시 돌아와 앉았다 다시 아이들 틈으로 끼어들곤 했다. 담임의 눈초리와 차창 틀에 늘어붙은 시간의 중압감이 버겨워도, 병신같은 새끼들 틈에 끼어 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빌어먹게 천천히 달리는 열차의 단조로운 바퀴음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한시간여를 꼼짝 않고 홀로 앉아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각선으로 앉아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담임의 눈초리는 외로움의 어두운 구석으로 나를 밀어넣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담임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열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담임이 졸았다. 나는 담임을 피하여 조용히 다른 객차로 옮겨갔다. 그 이후 수학여행동안 딱 한번 담임과 마주쳤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담임이 방문을 열었고, 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후 그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이학년이 다 지나도록 담임은 한번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담임은 그나마 따스한 마음을 가진 선생이었다. 그에게 미안했지만, 애써 나에게 무관심한 담임이 편했다.

내가 느낀 외로움은 보통 사람들이 외롭다고 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게다가 복학을 하고 내가 느낀 외로움은 또 다르다.

본래 나는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려도 가끔 떠들 뿐, 대충은 놈들의 이야기나 듣는 것이 다였다. 한시간이건 두시간이건 친구가 하는 말을 죽치고 들었다. 열심히 들었다. 때로 내가 이야기를 하거나 농담을 하면, 너두 말같은 것 할 줄 아냐? 하고 놈들은 내 말을 씹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에게 중요한 일이 생기면 나에게 와서 묻곤 했다.

복학을 한 그 해,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불현듯 한달동안 말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말을 걸거나 전화를 할, 아는 사람이 나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과 대학교를 다니며 사귄 친구, 여자 친구 모두가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떠나버렸다기 보다 사라져 버렸다.

그들 모두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면 게으르고 메마른 나의 인간성 때문이다. 한번도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불편한 감정들을 내 속에 가꾼 적이 없었던 댓가로 말이다.

학과 수업을 다 마친 상태라서 4학년 내내 타학과의 수업을 들었다. 조용히 수업에 들어가 한쪽 구석에서 3년간 써볼 일 없던 용어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다른 용어들과의 함수관계들을 힘들게 도출해내거나, 교정의 한쪽 구석에서 다음 수업을 기다리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단순한 나날들 속에서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 시간동안 내 몸이 서서히 탈색되고 투명해져서,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좁은 골목에 서면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지 못하고 나와 부딪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비켜서기도 했다.

사람이 그리웠다. 친구들과 아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소리높혀 하는 모습, 건널목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그녀를 본 순간, 그녀의 귓가에서 목덜미 사이에 가지런히 난 솜털 위로 햇볕이 떨어지고 솜털에 깨져 은은한 광채로 빛나던 광경을 목도하고 그 목 위로 나의 입술을 가져가고 싶던 그 나른한 순간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그래서?”하고 그녀의 입술에 묻던 그 목소리, 그녀를 가슴에 안았을 때, 내 가슴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던 내 생애에 다시는 형용할 수 없을 것 같던 수식어들을 무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향기들, 그녀의 입술.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나와는 아무런 혈연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삭막한 가슴을 부여안고 눈물처럼 사람이 그리웠다.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광교에서 7번 버스에서 내려, 인파가 쏟아져 내리는 종로 2가의 골목으로 접어들었고, 사람들의 어깨에 나의 어깨를 부비며, 골목의 어디쯤에 한번이라도 나와 마주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고 두리번거렸다.

도시란 맹랑한 곳이어서 무수한 사람들 속에 내가 알거나, 나를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그들에게 나는 실존하지 않는 익명의 다수 중의 하나, 모르거나 존재치 않는 어떤 자였다.

어디로 가는지, 왜 저리 바쁜지 모를 인파들이 좁다란 골목으로 내게로 쏟아져왔다가 밀물처럼 무의미하게 스쳐지나는 것을 한동안 바라본 후, 종로서점으로 올라가 이러 저런 책을 고르고, 홀로 그 넓은 양지다방의 한쪽 구석으로 스며들어가 커피를 마신 후 낙원동의 허리우드 극장으로 올라갔다.

극장 안은 조금 슬펐다. 어둠의 밑에 그림자로 가라앉은 사람들이 몇시간동안 묵묵히 스크린을 바라보며 자신의 시간을 조금씩 죽여가는 침묵의 의식이 그랬다. 게다가 극장의 천장은 이유없이 높고, 천년동안 어둠에 갇혀 있었을 습기와 냉랭한 냄새들. 니코틴 내음. 그리고 어둠 속에 밝게 영사되는 장면들을 쫓아가다 보면, 자신의 현실을 방기하게 되는 몰입들,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미 여덟번이나 본 영화였지만 나는 고향에 돌아온 것과 같은 편안함으로 북군의 포격에 무너져 내리는 아틀란타를 바라보았다.

네시간 짜리 영화가 끝났을 때, 극장의 계단 밖에는 이미 밤이었다. 타라의 붉은 노을을 극장 안에 가둬두고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가 낙원동이라는 현실 속에 나는 투기됐다. 카바이트 거품을 물고 익어가는 밀막걸리의 쉰내가 거리에 등청했다. 값싼 튀김기름을 두른 파전이 익어가는 느끼한 냄새 속에 야! 이 새끼야~, X같어서, 내가 생각할 때는…, 니미, 넌 내 맘을 오해한거야,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씨팔 군발이새끼들이…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소리 높혀 떠드는 소리, 양은 주전자 뚜껑을 스텐 젓가락으로 땡강땡강 두드리는 낮은 노래소리에 늦여름의 밤이 하얗게 떠올랐다 사위어 갔다.

인도로 몰려나온 술자리를 피하여 차도를 따라 종로 쪽으로 내려갔다.

그냥 인생은 흘러가는 거야. 새 것은 금새 낡아빠져버리거나, 외로움 또한 희미해지고 고통이나 쾌락같은 것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아무 것도 결론이 없고 하염없는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말거야. 그러니 지금 여기에 연연하지 말자고 씨부렸다.

하지만 노랗게 바래가는 삼십촉 백열전구 아래, 베니다판으로 만든 딱딱한 의자 위에 비스듬히 엉덩이를 걸치고, 애인이나 친구에게 아무 의미없는 말을 지껄여대며 밤을 새고 싶었다. 그 어린 날들의 동화와 내가 사랑했던 사실들과 내가 거부했던 우정이 나의 진정한 우정이었으며, 나는 결코 타락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너무 순수하고 너무 진실했던 탓에 너무 밝았던 나의 진리가 너희들을 눈멀게 했다고, 그래서 나는 너무 외로웠다. 너희들이 침을 뱉어도, 너에게 환멸을 느꼈다고 높은 음자리로 매몰차게 말한다고 해도, 나는 마지막 남은 무릎을 이끌고 너희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고, 그리고 정말로 나는 아뭇 것도 아닌 놈이라고 말하고 너의 어깨를 끌어안고 울고 싶었다. 술에 취해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잡고 제발 제 이야기를 한번 만 들어주세요 라고 빌고 싶었다.

아니면 종로 3가의 골목으로 들어가 아직도 남아있는 매춘부의 좁고 낡은 방 안으로 들어가 화대를 치른 후, 나의 젊음이 어떤 모양으로 흘러왔고 어떻게 자멸했으며,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를 이야기 한 후 그녀의 몸 속에 깃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종로의 모퉁이였다. 십원짜리 동전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공중전화의 아가리에 딸깍 동전을 넣었다. 뚜~소리를 한참 듣고 있다가 기억 속에 남아있는 번호를 돌렸다.

“여보세요.”
“나다.”
“오~ 이거 누구냐? 제대했냐?”
“민간인된지 오래됐다.”
“어디냐?”
“목소리 들었으니 됐다. 끊는다.”

전화를 무던히 끊고 난 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전화번호를 기억할 수 없었다. 다시 광교로 내려가 7번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항상 내가 앉았던 끝의 두번째 자리 앞에 섰다. 앉았던 손님이 이대입구에서 내리고 그 자리에 앉았다. 신촌을 지났다. 서강으로 사라져 가는 좁은 길과 상가들의 불빛이 어둠 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흔들리는 버스의 내가 4년동안 늘 앉았던 그 권좌에서 스쳐지나는 풍경을 보았다. 외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진부한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이유도 없이 매혹적인 것을 따르거나, 소란 속에 예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 댓가란 늘 가난이었다. 돈이 없어서 길거리로 내몰리거나, 한없이 외로운 것. 그리하여 우리는 지구의 한 가운데 서게 되며, 무저갱과 같은 가난 속으로 온갖 것들이 흘러드는 것이다. 풍경과 그리움과 아무 것도 아닌 것들, 아무 것도 아니라서 쌓이고 쌓여서 가슴에 상처를 남기거나, 기쁨으로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늘 외로우며, 그 외로움으로 부터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의 권좌를 애처롭게 수호하는 것이며, 마침내 외로움이 조화와 평화의 입법관이었음을 애처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합정동 로타리에서 버스에서 나는 내렸고, 길을 건너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을 바라보자 더 이상 외로움이 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래서 늘 세상의 풍경들이 용서하고 또 다른 내일을 예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20090916

This Post Has 6 Comments

  1. 흰돌고래

    학창시절부터 남다르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그 훨씬 전 부터 인가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글의 제목과 글이 꼭 어울린다고 할까요? 안타까운 면도 있지만 어떤 면은조금 부럽기도 하구요. 소설같은 이야기에요.

    1. 여인

      이 글은 저 자신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대부분의 추억은 넌픽션같지만 픽션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의 감정보다는 현재 기억하는 감정들이 반영되고, 그 감정들은 미화되거나 과장되고 편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들이 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합니다. 적당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쓸데없이 긴 이야기를 다 읽어보신 모양이네요. 블로그, 네이버에서는 읽어도 젊은 사람이 주를 이루는 테터툴스나 텍스트큐브에서는 안 읽는 것 같던데요.

    2. 흰돌고래

      아침에 잠깐 하려고 했는데 여인님 글 읽다가 꽤나 오래 해버렸어요.. ㅎㅎ

    3. 여인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하나의 기록으로 쓴 글이 길어졌는데, 읽으셨다니 놀랐습니다.

  2. blueprint

    자신이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된것이 여인님은 객지였다면 전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던것 같습니다.
    황석영씨의 책은 아직 못 읽어봤네요…

    1. 旅인

      저 책을 읽기 이전에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지요. 먹먹하긴 하지만 너무 동화같아서 아득한 나라의 착한 나라 사람들의 비극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뫼비우스 띠라든가 클라인 병 만 생각나네요.
      아마 저의 인지력이 조세희씨의 책이나 카프카의 글을 이해하기에 미흡(변신도 그때 읽었지만 뭔 소리지? 했습니다)한 때에 읽지 않았나 싶습니다.
      황석영씨가 배신을 해서 저도 그의 글을 읽지 않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