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장의 사진

장모님을 화장하기 위하여 서울 서초구 원지동의 서울추모공원에 가니 예전의 화장터와 달리 격조있고 깨끗하면서도 아늑하여 망자의 가족들의 슬프고 지친 심사를 약간이나마 달래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건물 이곳 저곳에서 낮은 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거나, 며칠밤 빈소를 지키다 지친 육신을 의자 속에 묻고 쪽잠을 자다가 망자를 봉송한다는 방송을 듣고 1층으로 내려가 화장로로 시신을 운구를 하며 가족들은 오열을 한다. 오열은 피로로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상주의 육신 저 안에서 마치 풍선이나 기포가 터지듯 터져나온다. 슬픔이 울음을 몰아내오는 것인지 울음이 슬픔을 몰아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망연히 울음소리를 듣던 다른 상가집 사람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화장로로 장모님을 모시고 수골하기까지 80분 정도 걸렸다. 유족 대기실은 넓은 한실이었지만, 지친 몸을 방바닥에 부린 처가 식구들은 침묵했고, 대기실에 오지 않은 아내를 찾기 위해 추모공원의 건물 안을 배회했다.

추모공원 1층에 갤러리가 있었는데 1960년대 초반의 서울의 사진들이 있었다. 그 중 아래의 사진은 내가 처음 서울로 올라왔던 1961년의 수색공민학교 사진이다. 천막 교실 뒤로 언덕배기에 군용천막으로 지은 집들이 보인다. 저 학교를 1964년 혹은 1965년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과 3~4년 사이에 저 자리 즈음에 코울타르를 먹인 까만 널판지로 지은 단층짜리 교사가 들어섰고 수색국민학교로 개명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 때까지만 해도 국민(nation)이라는 단어보다 공민증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공민(citizen)이라는 단어가 더 보편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사대문 안 수송국민학교(현 종로구청 자리)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가, 서울의 서쪽 끝에 있던 이 학교로 발령이 난다. 아버지는 어두운 새벽에 집 골목을 벗어나 무학재 너머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산과 들을 지나 학교를 갔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시면 날은 까맣게 저물었다.

무슨 연고인지 모르지만 아버지께서는 수색에 있는 저 학교로 예닐곱살인 내 손을 이끌고 갔다. 나는 교단 옆에 놓인 아버지의 책상에 앉아 5~6학년 형들이 떠든다고 땡!하고 책상 위에 있는 교탁종을 울리거나 쪽빛 칠판 위에 하얗게 판서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창 밖으로는 한낮의 운동장이 노랗게 밝았고 학교는 언덕배기에 있었는지 운동장 아래로 내리막길이 있었고 집과 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래의 사진은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서울이나 지방 곳곳에서 볼 수 있던 풍경이다. 민둥산 곳곳에 한두칸의 방과 부엌 만 있는 집들이 서울의 변두리로 변두리로 번져가고 있었다. 저 때만 해도 삶의 의미란 한마디로 집약되는데, 그것은 생존이었다. 제법 산다 하는 어른들도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한다”고 했고, 아이들은 동네 어른들께 “진지드셨습니까?”하고 안부를 여쭈었다.

사진의 풍경이 아버지가 보낸 세월의 풍경일까 나의 세월의 풍경일까 생각하면, 아득했다. 사람만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산천초목조차 굶주렸던 세월이었다는 것을 아래의 사진은 여실히 보여준다.

밑의 사진은 지금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짖고 있는 시민회관의 모습이다. 1960년 7월 31일 경향신문을 보면, 한글학자인 최현배 선생의 글이 있는데, 4·19의거로 하야한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회관의 명칭을 세종문화관, 세종회관 등으로 고치자고 하면서 8억환이나 들였으면서도 아직도 준공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서울시민회관으로 명명되고, 1972년 12월 화재로 소실된 후, 1974년 세종문화회관을 착공하고 1978년에 준공된다. 어렸을 적 시민회관은 참으로 서민적이었다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은 반서민적이란 느낌이다. 하지만 세종문화회관에 부조되어 있는 비천상은 참으로 육감적이다.

참고로 당시의 지표를 올린다.

ps. 수색공민학교의 사진에 feel~이 꽂힌 이유는 아버지께서는 민족동란의 그 시기에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학교가 군대에 징발당한 관계로 저 사진처럼 산 언덕에 천막을 치고 아이들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때 라이프지의 기자들이 와서 수업 모습을 찍어 ‘푸른교실’이라는 이름의 사진을 게재하여 전세계에 배포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정시대에 황국신민의 훈도를 담당하라는 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졸업과 거반 동시에 광복을 했고, 새나라의 어린이를 가르치게 되었고, 전시에는 비바람 속에서 천막을 치고 어린 아이들의 어깨를 좁혀라 하고 “가갸거겨, 삼칠은 이십일” 등을 가르치셨고,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부산에서 선생을 하다 서울지역 임용고시에서 수석을 하여 배치된 학교임에도 사대문 안 삼대 공립학교(덕수, 수송, 혜화)의 선생으로 치맛바람을 조장하고 촌지 등 각종 특혜를 누렸을 것이라는 이유로 서울 저 멀리 수색의 어느 학교로 전근발령이 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예닐곱살 난 아들의 손을 이끌고 세상 끝과 같은 그 곳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하지만 철부지 아들은 그곳에 대한 기억보다 기아선상에 놓여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점심 때 배급된 옥수수빵이 맛있었다. 그 아들은 그 날 자신에게 배급된 옥수수빵의 의미가 맛이 아니라 생존이란 것조차 모르고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산과 들을 지나 늦은 밤에 집에 당도하신 아버지께 다녀오셨습니까 하는 인사와 함께 “아버지 옥수수빵 안가져오셨어요?”하고 묻곤 했다.

This Post Has 5 Comments

  1. 위소보루

    저 사진들을 보면서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빠름과는 다른 느림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굶주림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아직도 나는 철이 덜 들었구나 싶습니다. 좋은 사진들 감사합니다.

    1. 흰돌

      위소보루님 댓글, 완전 공감되네요ㅠ.ㅠ

    2. 旅인

      그런데 저도 굶주림만 보았지 내 배로 느끼지 못한 사람이라, 저도 철들지 못하기는 매 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희한한 것은 남이 아무리 먹어도 내 배는 조금도 부르지 못하고 엇그제 배가 터지도록 세끼를 먹어도 오늘의 한끼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자 슬픔입니다. — 호모밥이엔스 —

  2. 선수

    할머님 rest in peace..

    저는 저 시절 살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아련하고 향수랄지 그런지요
    항상 여인님 얘기를 들으면 에피소드와 같이 옛시절 얘기가 더 듣고싶고 그런것 같아요
    참 저 네이버블로그로 옮겼어요 한국오니 인터넷스피드가 확실히 다르긴 다른것 가타요 하핫^^

    1. 旅인

      이른바 뇌이버 잘돌지요? 친구맺기도 좋고…
      저도 옛날을 잘모릅니다.
      이제 한국 생활에는 익숙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안하시고요?

      장모님은 거기로 가셔서 편안하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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