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MXC a.D.그리고 소설, 출장

그제(20120514)

MCMXC a.D.는 기원후 1990년이다. 즉 anno Domini 1990.

하루종일 회사 책상 주위를 돌며 코를 풀었다. 크리넥스 2통을 작살내고 지하철에 오르니 빨갛게 충혈된 눈이 시리다. 출장을 가기 위하여 하얀 새벽에 일어나 안개 자욱한 도시를 가로질러 아득한 서쪽, 영종도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감기가 다시 도지는 것 같다.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는다. 데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igi Sits Okto)에서 제목을 따왔을 것이다. 공산당원이자 가수인 아그네스 발차는 “카테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나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라고 애조가 깃든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기차가 떠나는 8시라는 시각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호하다. 하지만 기차는 정해진 시각에 떠날 것이다.

아침 9시 10분발 비행기지만 상사는 노파심에서 6시 30분에 만나자고 한다. 시간에 대기 위해서 4시 30분에 일어나야 한다.

내릴 역이 되어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덮었다. 책갈피 속에서 아이보리 비누 냄새와 같은 것, 그러면서도 미미한 피비린내같은 것이 파~하고 번지더니 금새 사라졌다. 한강, 공지영, 신경숙 등, 내가 읽은 여자들이 쓴 글, 아니 김훈 씨가 쓴 ‘언니의 폐경’에서도 그런 냄새가 났다.

책을 가방에 쑤셔박은 후 고개를 들었다. 검은 미니스커트 밑으로 하얗고 늘씬한 다리가 눈 앞에 들어왔다. 니트로 된 검은 미니스커트의 올 사이로 안쪽 허벅지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하얀 다리는 치마 속으로 감춰지며 검은 색으로 변하고 좁은 다리와 다리 사이,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허벅지를 객실의 형광등 불빛이 쓰다듬었다. 다리는 늘씬했고 싱싱해서 세포 하나 하나가 욕망과 쾌락으로 퍼덕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자의 손이 무심결에 말려올라가는 치마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나는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익명으로 퍼덕이는 젊은 다리를 실명으로 옭아매고자 하는, 아니면 해체된 부분을 얼굴을 중심으로 재조립하고 부분의 쾌락의 총합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아가씨는 자신의 손이 무심결에 치마를 내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둠이 까맣게 달라붙은 전철의 차창에 비춰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차창을 바라보는 시선은 응시와 촛점이 풀려지는 몽롱함이 중첩되이 었었다. 여자가 차창을 보고 미소를 지어보인다. 여자의 치마를 내리는 손과 차창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 그리고 생기로 가득한 그녀의 다리 모두가 하나로 응집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서 분열된 채 제각각이라는 느낌이다. 다시 코가 막혀 숨쉬기가 불편했고 몇시에 일어나 어디로 가서 공항버스를 타는 것이 좋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눈길이 아가씨의 사타구니 쪽에 다시 멈췄다. 늙고 무력한 나의 관음증이 무안했다.

PRINCIPLES OF LUST : 욕망과 욕정의 원리

MCMXC a.D.는 1990년에 발매되었다. 그 다음 해 둔촌동 사거리의 택시 안에서 좌회전 신호등이 들어오길 기다리던 22시에서 23시 사이, 지친 몸을 택시 뒷좌석에 묻은 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니그마의 노래를 들었다. 아마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곡은 Sadeness일 것이다.

그레고리안 성가 타입의 노래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반젤리스나 토미타 혹은 쟌 피에르 류의 신디사이져 음악과는 이제 결별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을 나는 예감했다.

Principles of Lust는 MCMXC a.D.의 첫번째 파트이자, 이 속에 마이클 크레투와 그의 동료들의 첫 싱글인 셈인 Sadeness가 들어있다. Sadeness는 슬픔이 아니다. 사드니스, 사전에 없는 단어다. 가학성음란증에 빠져있던 사드 후작적임으로 새겨야 할 지 모르겠다. 이니그마의 Sadeness는 사드 후작의 도착적인 믿음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사드니스에 나오는 그레고리안 성가 타입의 노래는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편 24:7~8)라고 한다. 이 노래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짖고 들의 성막에 있던 성궤를 지성소에 들일 때의 장면이라고 한다. 그때는 기원전 957년경이고 솔로몬의 치세였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안, 하르 하바이트(聖殿山)에 있었다. 두마리의 ‘그룹’ 1cherubim : 그룹(cherub)이라고도 한다. 하느님이 에덴에서 사람을 쫓아내고 동산의 동편에 풀어놓았다. 또 하느님의 보좌나 성스러운 장소를 지키는 것으로 믿어, ‘계약의 궤’에는 황금으로 만든 케루빔이 배치되어 있었다. 앗시리아의 신전을 지킨 사람의 얼굴에 숫소의 몸, 사자의 꼬리와 날개를 가진 케루빔이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cherub : 천사 혹은 천사와 같은 아이 이 날개로 보호하는 형상이 새겨진 성궤의 안에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두번째로 받아온 계명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계명은 하지 말라! 즉 욕정의 원리(Principles of Lust)에 반하는 열가지의 말씀(Decalogue)이 들어 있다. 데카로그는 하느님과 유대인들과의 계약인만큼, 성궤를 언약의 궤(The Arc of the Covenant)라고 했다. “이 언약을 지키는 한 너희를 창성케 할 것이며, 이를 어길시 국물도 없음은 물론 너희를 산산히 흐트려 바빌론의 강 가에서 울게 하거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진멸하리니…”하며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 탓에 그들은 선민이요, 계약맺기를 즐겨하는 장사치요, 고리대금업자이니…

그 이전까지 유대인들은 아무 신이나 마구잽이로 믿었고, 신의 형상을 자기 멋대로 새겨 기도했으며, 신의 이름을 경망되이 함부로 불렀을 뿐 아니라, 평일이나 안식일의 구분이 없었고, 부모에게 불효함은 다반사요, 함부로 사람을 죽였고, 아무나 눈이 맞으면 교접했으며, 도둑질은 취미생활이고, 공회와 법정에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거짓증언을 밥먹듯 하고, 늘 이웃의 재물을 탐내곤 했다고 십계명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십계명(Ten Commandments)은 분명 욕정과 욕망의 원리(Principles of Lust)에 반한다.

어제(20120515)

식은 땀을 흘리며 일어났을 때 새벽 두시였고, 소변을 보고 침대에 기어들어가자 다시 네시였다. 화장실의 불을 켜자 서치라이트 빛이 눈을 찌르고 들듯 눈이 부시고 아프고 쓰라렸다. 샤워를 하고 속옷을 갈아입고 삼성동 공항터미널로 갔다. 신새벽의 공복을 달래기 위해 시킨 고구마라테가 식어서 먹기 좋을 만한 즈음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첫 버스에 올랐다. 고구마라테를 다 마시고 난 후 혼절했는지 공항이라는 안내방송에 깨어났다. 공항 도착시각은 06시 10분, 새벽을 가르며 달리는 차들은 예정시간보다 다급하게 목적지에 다달았다.

무료한 나는 공항청사를 어슬렁거리며 뭔가를 생각했다.

친구나 첫사랑, 은사님들, 잊어버린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에 대한 것이었다. 나에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없었다. 보고 싶기는 하나 그런 프로그램에 나가 “이런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고 말할 만큼의 절박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가슴을 치고, 벅차게 서로 껴안아야 할 그런 그리움이 나에겐 없다. 살아온 삶의 색채가 어찌 이토록 단순하며 그저 흘러가 아득해져 버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박한 그리움이 없는 만큼, 타인들의 나에 대한 그리움 또한 백지처럼 하얗고, 한 때 사랑했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모처에서 다시 만나도 가슴 뛸 일이 없는 사람으로 하얗게 소외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그지같은 인생일까? 왜 아무도 그립지 않단 말인가?

하늘까지 높게 쌓아올린 공항청사의 유리창 앞에서 하늘을 보며 의자 위에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

MEA CULPA : 내 탓이요

MCMXC a.D.의 두번째 싱글파트는 미에 쿠에바(Mea Culpa가 내게는 그렇게 들린다)다. 이는 16세기 이후 미사의 전례화된 고백의 시간에 가슴을 세번치며 읊조리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는 라틴어 문구 중 일부다.

신도도 아니고 한글 전례문에 대하여 과문한 탓에, 영문을 전례문을 보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나의 형제 자매이신 여러분 앞에 제가 지은 큰 죄를 고백하노니, 제가 생각으로건, 말이건, 행위 가운데 짖거나, 저질러 어그러진 것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다 내 큰 탓이오니,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자들, 그리고 나의 형제 자매이신 여러분 앞에 자비로움을 간구하고, 저를 위하여 주님이신 하느님께 기도해 주심을 비나이다. 2I confess to almighty God 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greatly sinned,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through my fault, through my own fault, through my own most grievous fault; therefore I ask blessed Mary ever-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라고 되어 있다.

비행기는 9시 10분 이륙하여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아간다.

그래 다 내 탓이다. 사랑하지 못한 죄, 사랑하되 그것을 감추고 말하지 못한 죄, 나를 사랑함을 알면서도 안아주지 못한 죄, 다 내 큰 탓이다.

오늘(20120516)

호텔의 TV를 켜 놓은 채 잤던 모양으로 치이~소리와 함께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붉고 푸르거나 초록색의 화면조정 불빛에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 현지시간 06시 30분에 자명종을 맞춰놓았지만 불쑥 다시 일어나 TV를 끄고 침대에서 누워 뒤척인 시간이 04시 30분이다.

벌써 창 밖으로는 동틀 준비로 하늘이 무르익고 있었다. 서울과 시차가 1시간에 불과한 이 곳으로 볼 때, 동트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하늘은 이미 밝았다.

속옷차림으로 베란다로 나가 도시의 가로등 불빛이 점차 외로워지는 풍경을 보았다. 어둠의 위로 아침이 내습하는 모습은 믿을 수 없게 천천히 다가오지만 아침은 느닷없이 밝고 가로등은 무용지물이 되어 마른가지처럼 앙상하다.

청도(푸른섬)는 교주만의 동쪽에 있으며 만의 건너편에 황도(노란섬)가 있다. 류팅에 있는 국제공항에서 황도로 오는 사이, 홍도(붉은섬)라는 지명도 보았다.

호텔의 베란다에서 경제개발구의 한켠에 가설된 것같은 거리를 내려다 본다.

너무 뻔하여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풍경. 낮은 언덕이 있고, 그 사이로 도로가 있고, 언덕마루까지 같은 모양의 집이 들어서 있고, 그 뒤로 아파트 단지 그리고 아득히 먼 곳에 산이 보이는 풍경이다. 그것도 커다란 산은 착시일 뿐 시골마을 뒷동산 정도로 낮은 돌산일 뿐이다. 아득히 먼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공해에 찌든 잿빛공기 탓이다.

좁은 반경 속에 풍경은 갇혀있고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의 세세한 윤곽까지 뚜렷하며, 시선이 가닿지 못할 곳이 없을 뿐 아니라, 같은 해에 같이 지어진 천편일률의 건물들, 시간의 흔적이 손망실 처리된 동네. 단지 먹고 자고 일하러 나가기 위한 베드타운 기능 외엔 없는 동네다. 그래서 이 동네의 집과 건물들에는 삶이라는 중력을 찾아볼 수 없고 대지와 친화하지 못하여 조금 들떠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 동네로 흘러들어 서식하다가 또 물이 빠지듯 빠져나갈 것이다. 시간의 그늘이나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흘려보낼 여지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냄새가 없다. 그러한 공허함을 매우기라도 하려는 듯 동네의 한쪽 건물 위에 BAR라고 쓰여진 네온싸인이 걸쳐져 있는데, 우습꽝스럽고 그 동네가 지닐 수 있는 최대한 쾌락의 지수가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09:45분 발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7시30분에 호텔을 출발한 차는 공항을 지척에 남겨놓은 8시에 도로의 차량들과 엉켜 그만 멈춰섰다. 결국 비행기가 이륙한 09:50분 쯤 도로가 풀리고 10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항공편은 14:50분이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다시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편다.

신경숙은 자살 시도 후 선택적 기억상실에 빠진 조카와 그런 조카를 얼마간 돌보지만 자신 또한 선택적 기억상실로 조카와 거의 같은 나이였던 21살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모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연약했다. 그들을 선택적 기억상실로 내몬 가해자들, 조카의 친구나 자신의 제자는 그녀들보다 더욱 가엽고 연약해서 배신임을 알면서도 친구의 남자와 선생의 남자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신경숙은 남자들이 그런 여자들을 보듬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자는 함께 떠나기로 한 그 시각에 나타나지 않고 결국 카테리나행 열차는 떠난다. 그 시각은 7시가 아니고 8시이지만 그 시간이 아침인지 저녁 때인지 나는 모른다.

신경숙은 남자가 얼마만큼 연약한 존재인지 모른다. 남자는 너무 연약해서 늘 현실 앞에서 사랑을 포기한다. 그리고 자신 만의 합리화와 변명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식구와 친구와 세상의 모든 것으로 부터 소외되고 하얗게 늙어가는 것을 택하게 되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모른다. 그녀가 이런 단순한 것을 모르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자는 선택적 기억상실 속에서 잊었던 과거를 찾게 되고 드디어 현실과 타협을 하고 조카는 두드려패는 가학성음란증(드럼)을 통해서 자신이 미워하고 돌아서야했던 것들을 직시하거나 살아갈 터무니없는 이유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찾을 생각도 없이 살아갈 뿐이다. 나에겐 이 생이 절망스러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다. 단지 심심하고 재미가 없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은 소설이 될 수 없고 그냥 현실 속에 정박해 있는 것이다.

BACK TO THE RIVERS OF BELIEF : 믿음의 강으로 돌아가다

비행기는 14:50분을 조금 지난 시각에 창공으로 떴고 서해상에서 난기류를 만났다. 비행기의 동체는 얼개가 어긋나서 결구가 사무치는 끼륵끼륵 소리를 내며 좌우로 흔들리거나 조그만 에어포켓과 같은 것에 빠져 쿵쾅거리기도 했다. 무서웠다.

믿음의 강(Rivers of Belief)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이 믿음의 강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MCMXC a.D.앨범의 후반부에 있다. 이 믿음의 강의 초반은 스필버그 감독의 ‘미지와의 조우’에서 나왔던 음악과 매력적인 그레고리안 성가가 섞인다. 여기가 영원으로 가는 길(Way to Eternity)이다. 강한 비트풍의 할렐루야(Hallelujah)에서는 정통파적인 비잔티움풍의 성가가 나오면서 믿음의 강(Rivers of Belief)로 이어지고 크레투 자신의 노래가 나온다. 노래가 끝난 뒤 잠시 침묵이 있은 후, 어느 남자가 말한다.

When the Lamb opened the seventh seal, silence covered the sky. 3어린 양이 일곱번째 봉인을 열자, 침묵이 하늘을 가렸다.(계시록 8장 1절) 하지만 New Standard America Bible에는 ‘And when He broke the seventh seal, there was silence in heaven for about half an hour.’라고 ‘반시간 가량’이라는 문구가 더 들어가 있다.

계시록의 같은 장 마지막에는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라고 쓰여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공항철도를 한번 갈아타고 거의 집에 다다랐을때, 소설은 끝났다. 책을 덮었다. 문득 아주 오래전 팔의 동맥을 끊어서 팔목에 하얀 붕대를 친친 감은 여자의 손을 잡았던 기억이 났다.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이상하게도 그녀의 손바닥으로 부터 가파르게 뛰는 맥박을 감지할 수 있었고 혹시 끊어진 동맥에서 다시 피가 분출되는 것은 아닌지, 내 손에서는 땀이 흘렀고 여자의 팔목의 서늘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왜 그녀의 손을 잡았으며, 그녀가 누구였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경미하기는 하지만 나도 선택적 기억상실이거나 혹은 치매의 초기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내릴 준비를 하자 그제처럼 한 아가씨가 내 앞에 섰다. 이번에는 미니가 아니라 하얀 스판바지다. 그 스판바지는 마치 살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호하는 뱀의 허물처럼 얇았다. 너무 꼭끼이는 것인지 신축성이 좋아서인지 바지는 아가씨의 속살의 소식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것은 물론, 피하지방 밑을 흐르는 모세혈관이 지방과 섞이면서 나타나는 살색이 흰 스판 위로 번져나오는 것 같았다.

이 몸에 만연한 색심이며, 고목나무에 핀 춘심이여! 그대에게 화, 화, 화가 있을진저!

첨언, 사족

1990년이란 이니그마가 첫 앨범을 발매하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해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80년대 동구가 붕괴되고,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으며 소련이 와해되고 냉전 체제는 종식되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면서 인류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 1990년으로 진입했다. 1990년은 세번째 밀레니엄으로 진입하는 초입이기도 했고 휴거가 일어나고 아마겟돈에서 인류 멸망을 위한 불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10년이기도 했다.

그래서 20세기 마지막 십년을 장식하는 비지니스는 종교일 것이며, 영성과 명상과 같은 것들이 창궐할 것이라고 했다. 그랬다 그 십년은 치열하게 종교적이었고 동시에 사이비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진리로 이끌 것은 무엇이던가?

우리가 믿음의 강에 당도하기 이전에, 우리를 에덴에서 뽑아 불신의 동쪽으로 내친 것은 대체 무엇인가? 왜 하와는 말씀(성령)과 뱀(The Voice & The Snake) 중 뱀을 따랐으며, 아담은 어쩌자고 하와의 유혹에 빠져든 것일까?

뱀이 거짓이며 말씀(성령)이 우리를 진리와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속단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치기 전에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4Then the Lord God said, Behold, the man has become like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stretch out his hand, and take also from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ever. (창세기 3장 22절)라며 누군가와 속삭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에덴에서 추방당한 진실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가 추방된 것은 선악과를 먹어 죄를 지은 탓이 아니라, 저들과 같아진다는 것!

이 구절에 입각하면 뱀의 말이 거짓일 수는 없다. 뱀의 말대로 하와와 아담은 눈이 밝아졌으나,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에 접근이 금지되었을 뿐이다.

이니그마의 앨범은 이처럼 신학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으며, 다채로운 음악이 신비롭게 혼효되어 있고, 고전적 음악을 신디사이져나 이국적인 악기와 엮어 신비로움을 엮어낸다. 게다가 엑스터시에 빠져든 여인의 거친 호흡을 가미하고 악마적이거나 아니면 천상의 목소리로 마치 진실을 알려주거나, 몸에 지울 수 없는 쾌락의 문신을 수 놓아 줄 것처럼 속삭인다.

진리란…진리란…다 그런 것이며,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이 울부짖으며 지키는) 금지된 (에덴의) 문을 두드린다고(Knocking on Forbidden Doors) ‘네개의 강’ 5에덴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인데, 네개의 강은 에덴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그 강들은 ① Pishon : 하빌라(Havilah)의 땅을 둘러 흐른다고 한다. 하빌라에서는 正金 뿐 아니라, 베델리엄(bdellium)과 줄마노(onyx)가 난다. ② Gihon : 구스(Cush)의 온 땅을 적신다. ③ Tigris : 힛데겔이라기도 하며, 앗시리아의 동쪽으로 흐른다. ④ Euphrates : 유브라데라기도 한다. 이 흐르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갈 것인지?

참고> 기차는7시에떠나네

참고> MCMXC a.D.

This Post Has 2 Comments

  1. frenger.me

    신경숙씨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라는 책도.
    그리고 이니그마의 곡들도 다 들어봐서 이 글이 약간 이해가 되요.
    출장 가셨군요. 잘 다녀오시구요~

    1. Rd.T 旅인

      요즘 여작가분들의 글을 보면서 놀랍니다. 공지영씨 한강씨 신경숙씨의 글들을 읽으면서 분들의 사유에 놀라고 부럽습니다.
      마이클 크레두의 작곡보다 서구의 기독교적 문화를 다층적으로 코딩하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그 능력과 서구 문화의 지층이 부럽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