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가루 날리는

시간은 빨리 간다. 오월 중순인 셈이다.

오늘은 음력으로 윤삼월 열아흐레다.

지난 주에는 출근길에 핸드폰을 집에 놓고 온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골목길의 담 너머 수풀 속에서 노란 먼지와 같은 것이 바람에 휩쓸려 골목으로 왈칵 쏟아져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처음에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이려니 했지만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고 서로 뭉쳐서 날리는 모양이 마치 精氣라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송화가루가 아닐까 싶었다.

처음 본 광경이다. 송화가루도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이 솔가지의 수술대를 때리면 바람을 타고 송화가루가 조금씩 대기 중에 풀려 나가 허공을 떠도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유정과 무정의 사이에서 천년을 죽은 듯 사는 것인줄로만 알았던 소나무도 봄바람이 불면 발정난 수술대를 곧추세웠다가 춘심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몽정이라도 하듯 왈칵 송화가루를 토해내고, 바람은 토해낸 송화가루를 이고 어디론가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노란 송화가루의 궤적으로 바람이 흘러감을 볼 수 있는데, 봄바람은 때론 가라앉거나 떠오르기도 하며 천천히 변두리의 골목을 누비는 것이다. 날리는 송화가루도 힘이 딸리는 놈은 떨어져 노랗게 아스팔트를 물들이는 것이라서 숫精이 암精을 만나 수정이 되고 씨가 되고 또 싹을 틔우게 될 인연이란 몹시 희유한 것으로 느껴졌다.

송화가루는 바람을 타고 황폐한 도시의 골목과 골목을 누비며 수정할 암술을 찾다가, 자동차의 본넷 위나 아스팔트 위로 노랗게 내려앉게 될 것이다. 자동차의 매연과 바람 속에 도로 위를 오락가락하다 노랗게 도로변으로 밀려난 송화가루는 장가도 못가고 늙어버린 총각처럼 누추해 보이며 안스럽다.

그리고 며칠이 안된 지난 금요일(5/4), KTX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중에 산등성이 위로 왈칵 토해져 나와 산을 휘감아 날리는 송화가루를 보았다. 멀리에서도 보일 만큼 날리는 송화가루의 범위는 넓었다. 아마 송화가루는 바람을 타고 다른 편 산능성이를 돌아 무차별적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들이나 산이나 나무가지나 들풀이나…… 그 중 재수가 좋은 송화가루는 소나무의 거친 암술에 내려앉을 것이다.

불현듯 고등학교 1학년 때 교과서에 실렸던 박목월 씨의 송화가루 날리는 윤사월이 생각났다.

지금은 윤사월이 아니라, 벚꽃도 지고 꾀꼬리가 우는 여름과 같은 윤삼월이다.

20120509

This Post Has 6 Comments

  1. 흰돌고래

    요즘 저희집 방안에도 송화가루가 날아들어요.
    그래서 매일 청소를 하고 걸레질도 한답니다..
    (평소엔 안그러거든요-.-;)
    공기에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_+
    갑자기 송화가루가 낭만적인 느낌이..

    1. 旅인

      송화가루를 고물로 쓴 떡이 콩가루를 고물로 쓴 떡에 비하여 고급이라네요.
      제가 골목에서 본 송화가루 날리는 모습은 누가 진공청소기에 든 먼지를 바람을 불어 푹하고 쏟아낸 것 같았는데 그 먼지가 그냥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떠다니다가 흐트러지더군요.
      열차에서 본 송화가루가 날리는 모습은 시골 철도 옆에 보이는 자그마한 산능성이의 한 1/3 크기로 송화가루가 떠올라 산을 한동안 휘감아 도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그런 모습과 같은 것에서 장자는 대붕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 마가진

    송화가루는 이름부터 낭만스럽습니다.
    아마도 적어주셨듯 박목월님의 시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1. 旅인

      윤사월이나 나그네나 교과서에 실리고 한 워낙 유명한 시라서 언듯 언듯 기억이 납니다.

  3. 후박나무

    봄날 비온 뒤 아스팔트위에 노랗게 묻어있던 것이
    어쩌면 황사가 아니라 송화가루였을지도 모르겟네요…
    무심코 지나쳤는데, 여인님 글 읽고 나니
    아스팔트 위에서 도로변으로 밀려난 송화가루가 정말 안스럽게 느껴지는….ㅠ

    1. 旅인

      출장을 갔다가 와서 댓글이 늦었습니다.

      저도 황사라고 알고 있었을 겁니다. 꽃가루등이 부유하다가 말라붙은 것이라는 것은 최근에서야 알았지요.

      생명이란 참 놀랍기도 하고 몹시 소모적인 것이란 느낌도 듭니다. 어느 날 보면 판콘 터지듯 잎이 피고 꽃도 피고 하다가 무성히 자라고 또 잎을 떨구며 생명을 면면히 이어가는 것을 보면 유정의 것들이 바위와 같은 무정의 것들보다 더 오래오래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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