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를 위하여…

1.

간혹 여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꾼다. 그러면 거지같은 남자 놈들이 다스리는 이 무도하고 패륜적인 세상과 뭔지 모르지만 다를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2.

남녀평등은 커녕 오히려 여성상위시대라고 한다. 그 실증적인 예가 나다. 하지만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과 여성이 우월하다는 것이 어떤 맥락에서 회자되고 있는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 입시나 사법연수원 졸업성적 등에서 여성들이 상위를 치달리고 있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성적에 의한 평가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평등하거나 뛰어나다는 평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남자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에 여자가 진입하고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는 지표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는 고급 노동시장에 노동력의 공급을 확충해야겠다는 시장논리가 있고 거기에 여성이 뛰어들었으며, 남자 놈이 여자에게 작살나게 얻어터지고 저임 노동시장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런 남성 중심적이고 경쟁적인 평가제도가 부각되다보니 이른바 뛰어나다고 하는 여성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부드러움과 우아함이 아니라 남성보다 더 치열하게 남성적이고 투쟁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외면적으로는 섹시하다로 여성의 性이 부각되는 반면, 여자들의 내면은 근육질로 다져지고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

3.

여자 속에서 우월한 점을 찾아내지 않는다면,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거나 우월하게 되기 이전에 여자가 간직해야 할 여성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웃기는 짬뽕이거나 짜장면이 되는데… 그것은 결국 요즘 여자들이 불과 몇십년전 제대로 배우지 조차 못했던 여인네들보다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은 물론 품위와 우아함마저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의 상실은 결국 남자들이 얼굴에 팩이나 하고 화장품에 매달리게 하는 등 남성의 찌질함마저 초래한다. 대신 여자들은 거칠고 사나워진다.

4.

폐경이 지난 여성의 아름다움은 분칠로 더 이상 가꾸어질 수 없다. (자식들을 포함)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마음과 육신에 새겨진 내력으로 아름다움은 황혼을 빛내고 그윽하게 한다.

5.

작년 10월부터 전문가적 지식을 배경으로 낙하산을 타고 온, 오십이 넘은 노처녀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된다. 죽을 맛이다.

살자고 하는 일을 그녀는 죽자고 한다. 하지만 죽자고 일하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죽자고 일하는지의 연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고 보고를 받지만,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못하는 것 같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까닭에 했던 일을 (저번에는 가로로 보고하고 이번에는 세로로 보고하는 등) 모양을 달리하여 또 하게 된다. 부분을 보고하면 전체가 안보이고 전체를 보고하면 디테일을 모르겠다고 짜증이다. 그녀가 죽자고 일을 하는 연유는 아마도 일을 안하면 불안하고 일찍 텅빈 집으로 돌아가 홀로 냉장고에서 묵은 찬을 꺼내고 보온밥통 속의 마른 밥을 퍼서 까만 밤이 몰려든 창을 보며 저녁을 먹을 때 문득 몰려들 공허와 외로움이 무섭기 때문에, 자정이 가깝거나 혹은 넘도록, 저쪽 복도 끝에서 이쪽 복도 끝까지 형광등을 입빠이로 켜고 나처럼 멍청한 직원 한두놈을 붙잡고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몇번 그녀와 함께 일을 한답시고 자정을 넘겼지만, 그 일이란 것이 다음날 아침에 한다고 해도 지장이 없는 시급성이 낮은 것이거나, 하품이 날 정도로 중요도가 낮은 일들이었다. 간혹 중요도가 있다면 높은 사람에게 보고할 자료이거나 발표자료인데, “무엇을 고쳐라. 이것은 보기가 싫다. 요부분은 현업에서 관심이 많을테니 사례를 들어야 한다.” 등등으로 주문이 많다. 멍청한 나는 그녀가 보고를 하거나 발표를 하는 줄 알고 그녀의 입맛에 맞춰 고치고 고친다. 자기 입맛대로 다 뜯어고치고 난 그녀는 자료를 한번 쭉 훑어보고 난 후, “이만하면 됐어요. 이걸루 발표하세요!” 이런 젠장할!

그녀가 하는 위대한 일이라곤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협력사의 컨설턴트들이 뭘 모른다, 일하는 것이 맞는다 틀린다며 싸우거나,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체시키고, 갈 방향을 흔들어 딴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 등이다. 조직 내 모두 그녀가 무슨 생각을 갖고 그런 지시를 하는 것일까 하며 의아해 한다. 우리의 상식과 지력은 그녀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간혹 그녀와 함께 했던 우리의 불행한 시간 속에서, 더 이상 자기를 상사로서 존경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거나, 그녀의 전문가적인 지식이 프로젝트에 도움은 커녕 딴지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우리들이 자신을 우습게 본다고 몽니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소통의 부재는 단절을 낳고 단절에 부딪히면 고집만 파르라니 남는다. 하얗게 분칠을 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 생명의 온기를 느낄 수 없어서 때론 불모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간혹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도 있다. 용도는 딸내미가 시집을 안간다고 하면, 여자가 시집을 가지 않으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괴물이 되고,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게 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렇게 쓰면 내가 그녀를 몹시 미워하고 있구나 생각들 하시겠지만, 천만이다. 무엇이 저 여자의 일생을 침식하고 저토록 망가지게 했으며, 그 피해가 그녀 자신에게 그치지 않고 나를 오염시키고 이토록 피로하게 하는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녀는 병들었고 아프다.

독신으로 찌들어 냉랭한 집으로 돌아가기 보다 늦은 시각까지 사무실에서 개기는 것을 택하는 그녀는 은근히(그녀는 저녁 8시가 넘으면 자신의 방에서 고개를 빼고 누가 사무실에 남아있는가를 아주 랜덤한 시간 단위로 점검하곤 한다. 그리고 먼저 퇴근한 직원들을 몰래몰래 증오한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우리가 늦게까지 남아 일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하여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지를 알려준 적은 없다. 늦게까지 남아 할 일이 없는 우리는 그녀를 위하여 연기를 한다. 인터넷을 일하듯 열심히 들여다 보거나 회의를 하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농담을 한다. 아니면 그녀에 대한 욕을 인사발령이라도 내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심각하게 한다.

이렇게 늦게 퇴근하거나 휴일날 출근해서 눈도장을 찍고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오도독 오도독 깨먹는다. 시간의 맛은 쓰고 떫다. 댓가로 잔업수당(= 택시비 + 야식대 + 몇천원 하면 땡이다)을 챙긴다. 그러면 약간 피곤하고 회사에다 대고 쌍욕을 하고 싶어진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생산성이 낮은 이유이자 전말이다. 그러니까 낮은 생산성은 조중동이 말하듯 노동자의 탓이 아니라 다 윗놈들 몫이며, 대한민국은 조금씩 불행해져 간다.

아무튼 나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하거나 국가경제라는 것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일한다. 만약 내가 하는 일도 일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20120412

This Post Has 11 Comments

  1. 마가진

    소설 같기도 하고, 실화(?)같기도 하고.. ^^;
    컥. 괴물.. 혐오감.. @.@

    근데 정말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수 있지만 사람이 힘들면 정말 버티기 힘들더군요.

    1. 旅인

      실화입니다. 좀 괴기스럽습니다. 요즘 그녀의 눈빛을 보면 섬뜩합니다.
      사람이 힘들다기 보다, 무엇이 저렇게 사람을 피폐하게 했는지 정말 궁금하며 안되었다는 생각만 자꾸 듭니다.
      워커홀맄의 말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10시에 사무실에서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면 11시가 되고 늦은 뉴스를 보면 뭣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지 참 허망하고 신경이 날카로와 잠도 잘 안옵니다.
      한 사람의 피폐함이 참으로 많은 사람을 황폐케 만드는 것 같습니다.

  2. IamHoya

    ‘커리어우먼’ 이라는 껍데기를 닦고, 쪼이고, 기름칠하느라 속은 썪어 문드러져가는 노처녀님들을 보고 있노라면.. 멀쩡한 사람의 속도 같이 썪어문드러져 가더군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모쪼록 잘 견뎌내시길 빕니다.

    1. 旅인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 때문에 가치관마져 서서히 균열되고 붕괴되어 가는 것이겠지요.
      저는 뻔뻔스럽게 이 상황을 견뎌내고 있지만 요즘 위장병이 생기기 시작했고 잘 낫지도 않네요.

  3. 흰돌고래

    결혼하지 않으면 정말 저리되는건가요… ㅋㅋㅋ
    책을 읽다가 우연히 ‘예전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길 보면,
    요즘 사람들보다 더 대단하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어요.
    그땐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을텐데, 어찌나 품위가 있고 지혜로운지요.

    1. 旅인

      꼭 그렇다고만 할 수 없지요. 수녀님이나 비구니승려들은 또 다르겠지요.
      저는 원시 부족이나 인디언들이 보여주는 품위와 지혜는 (자신의 성을 포함하여) 자연을 인정하고 함께 숨쉬는 것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오히려 제도권 교육이 천진에서 맑게 올라오는 인간의 고귀함과 품위를 크게 해하는 것 같습니다.

  4. frenger.me

    직장 생활이 매우 피곤하시겠어요.
    저도 비슷한 상황이에요. 매일매일이 술이라는.. ㅠ_ㅠ

    1. 旅인

      매일 술이라니… 걱정이겠습니다. 다행이 저는 사교적이 아니라서 술을 마시면 때론 우울해지고 피곤해지기 떄문에 그다지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으니 꼬이고 맺힌 것을 풀 길이 없고 대화가 더욱 서걱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5. 후박나무

    살자고 하는 일을 죽자고 하는 그녀….
    정말 피곤하시겠어요…ㅠ
    마가진님 말씀처럼 사람이 힘들면 정말 힘들다고 하던데…
    아무쪼록 이 사태(?)를 잘 극복하시길 바래요…

    1. 旅인

      저는 나름대로 뻐팅기는 힘이 있습니다. 일하는 척하면서 딴 짓하는데는 도가 틔였고, 나름 한 개기기 합니다. 그래서 글보다는 스트레스 많이 받지 않습니다. 염려마시길…

  6. 플로라

    1,2,3 정도까지읽으면서 아마도 아닐텐데…하였습니다….
    그러다 4,5 단락에서 역시나 ㅎㅎ~
    몇 주 전 여인님과 똑같은!!! 고민을 하는 분으로부터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다오…하는 상담을 들었어요. 그 분은 반대의 경우인 40대 노처녀 부하직원이었다는…
    제가 내려드린 진단도 부분과 전체, 디테일에 관한 것이었네요. 윗사람은 우습게 본다라는 피해의식, 아랫사람은 무시당한다는 피해의식도 공통이고.
    근데 집에 홀로남아있을 결혼한 여성도 그럴것같아요. 사랑 또는 관심을 주고받지못하는 여자의 모습이 저런걸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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