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1. 이번 휴가 중에

딸내미와 함께 입시지원서를 썼다. 자식의 입시지원서를 쓰는 일이란 아전인수(我田引水) 플러스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일이다. 이런 것을 쓰다보면 딸내미가 훌륭하다 못해 지원서를 낼 대학의 총장께서 직접 왕림해서 지원서를 받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딸아이도 그런 생각이 드는 지 몇줄 끼적거리고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고 카드를 받아가서는 으악 소리가 나는 계산서를 이틀 연짱 들고 들어온다. 체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좀 먹었다나? 딸내미는 훌륭할 뿐 아니라, 위대(胃大)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일박이일로 지방 소도시의 지점장으로 발령이 난 친구를 찾아가 저녁과 함께 술을 했다. 이른바 관사라는 곳에서 깨어난 아침, 지난 밤 집요하게 내리던 비는 그치고 창 밖은 맑았지만, 나의 몸 저 깊숙한 곳의 한쪽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전날밤, 저녁을 먹고 관사로 들어가자, 친구는 울릉도 태하 것이라며 오징어를 꺼내왔다.

친구는 바람 많은 덕장의 오징어라서 맛이 좋다고 했지만, 나는 1983년 홀로 갔던 태하에 있던 찻집이 생각났다. 아득한 전설과 같은 그때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해주고 싶었다.

작년에 고등학교 동창 몇명이 울릉도에 갔잖아?
으응, 규동이가 영화에서 간만에 대박을 터트렸다고 주관했던 여행? 바쁜데 어떻게 시간을 낼 수가 있었어?

친구는 그때 태하의 덕장에서 먹었던 오징어의 맛에 반해서 태하의 오징어를 주문해서 먹는다고 했고, 규동과 함께 갔던 이야기를 했다.

간신히 자신의 존재감을 추스르고 싶었던지 잠자기를 미루고 술을 마시며 나를 사부라고 부르던 규동과 태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취중의 이야기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부딪히며 흘렀고, 더 이상 술을 견디지 못한 나는 한쪽 방의 침대 위에 쓰러졌다.

치밀어오르는 몸의 열기와 위와 창자를 스치는 통증 때문에 깨어나 보니, 나는 대리석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다시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 에어컨을 켜고 열기를 식히며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법주사로 가기로 한 까닭에 친구가 깨웠을 때, 잠자리에 들기 전보다 더 취한 것만 같았다. 날은 활짝 개었고 아침 안개가 바람을 따라 도시의 외곽으로 말려가기 시작했다. 머리만 맑았다면 참 좋은 날이었다.

운전을 못하는 친구 대신 핸들을 잡았다. 차는 IC를 벗어나 몇개의 고속도로를 지나 청원에서 다시 청원 상주 간 고속도로를 탔고 보은IC에서 국도로 들어섰다. 나의 신경과 근육은 느슨하게 풀어져 촛점이 잡히지 않았고 아득한 풍경 속으로 몸살 기운이 스며들었다.

법주사 앞 정이품송을 지나 차를 세웠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멀었다. 정이품송에서 법주사까지 그다지 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절까지는 꽤나 멀었고 오솔길의 소나무는 우람찼다. 숲의 그늘과 안개 속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고 햇살은 분말처럼 비산되었다가 다시 숲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숲의 그늘에 누워 자고 싶었다.

일주문 지나 다리를 건너고 금강문을 지나자 커다란 물확이 보였다. 타는 갈증 때문에 물확에 고인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지근하다. 친구가 경내를 둘러보는 동안, 그늘이 드리운 팔상전 우측 계단에 앉아 잠시 졸았고, 또 사천왕문의 그늘 아래서 졸았다. 잠시 졸고 나자 그나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다.

경내를 한번 둘러본 후 금동미륵대불을 바라보며 나왔다. 예전 시멘트 공구리에 회칠을 했던 불상은 늘씬했는데 이번 불상은 좀 살이 찐 것 같다. 동쪽을 보고 있어서 아미타불인가 했더니 미륵불이란다.

몸의 상태가 웬만했으면 화양계곡으로 갔겠지만 절 앞에서 늦은 아침을 시켜놓고 입맛이 없어 뜨는 둥 마는 둥 지방도시로 돌아가 하루 더 놀다가라는 친구를 남겨놓고 고속버스에 오르고야 말았다.

서울로 가는 내내 잤다. 간혹 눈을 뜨면 버스의 시계는 도착해야 할 시간인 오후 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버스는 겨우 이천을 지나고 있다. 창 밖을 흘낏 내다본 후 다시 눈을 감는다.

서울에 들어서자 비가 내린다. 동서울터미널에 내려 언덕을 올라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의 시계는 오후 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의 시계가 고장이 났던 게군.” 이렇게 중얼거리며 짐도 풀지 못하고 침대에 맥없이 무너져 잠을 잤다.

낮이 지나고…… 늦은 오후가 시작되고…… “띠디띠디띠이 철컹!” 문이 열리고…… 아내가 “낮잠을 이렇게 자고 밤에는 어떻게 하려고?” 묻는 소리가 들렸고…… “이제 그만 일어나 밥 먹어요!”라는 소리가 거실 저편에서 아득하게 들렸다. 식은 땀에 범벅이 된 베개에서 겨우 머리를 떼어내고 흐트러진 정신의 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졸음이 몰려왔다. 저녁을 먹고 TV를 본 후 10시가 조금 지나 다시 침대로 기어올라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다.

무엇이 견딜 수 없는 피로감 속으로 몰고 가 하염없이 자게 했을까?

2. 불면(insomnia≠sleeplessness)

그동안 계속 되었던 불면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의 불면은 다른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 다른 이들은 잠이 들지 못하여 뒤척이는 반면,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기만 하면 잠이 들지만, 문득 깨는 불면이다.

잠들지 못하는 아내는 자신을 불면 속에 남겨놓은 채 자기만 살겠다고 자는 내가 때론 얄밉다고 하지만, 새벽 한시에 잠든 후 새벽 네시에 쓰라린 눈을 부비고 일어나 덜깬 몸뚱이를 거실 소파에 내동댕이치고 TV를 보는 나는, 늦은 아침까지 늘어지게 자는 아내가 부럽다.

조조각성(早朝覺醒 : 꼭두새벽에 깨어남)이라는 이 불면의 형태는 생체시계가 빨라진 노인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젊은이의 경우 꿈이 나타나는 REM 수면이 새벽 네시에서 한시나 두시로 당겨진 관계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와 같이 REM(Rapid Eye Movement) 수면에 장애를 보일 경우,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하지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우울한 것인지, 우울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침에 일찍 깨어나는 부류는 대개 두 종류다. 하나는 “야호! 소풍이다.” 또 하나는 “으악! 숙제를 까먹었다.” 즉 오늘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 둘 중 하나다.

후자보다 더 나쁜 경우도 있다. 더 이상 기대할 꿈이 없는 탓에 꿈으로 채워져야 할 REM 수면의 공간을 그만 현실이 침식해버린 경우다.

꼭두새벽과 잠의 끝자락과 중첩이 되는 곳에, ‘오늘’이, 어두컴컴한 잿빛 이마를 내 쪽으로 향하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모습이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며, 수세기 동안 그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끈덕지고, 보는 것 만으로도 잠이 달아날 정도로 재수가 없다. 어두운 새벽에 끈적거리는 거미줄을 헤치듯 일어나기도 하고, 초여름의 경우에는 ‘오늘’이 얇고 거무튀튀한 날개를 펼치는 순간, 날개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서 깨어나기도 한다. 맑은 햇살을 받으며 깨어난다고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날이 흐렸다면 조금 더 잘 수도 있었는데…’라고 쾌청한 날씨에 짜증을 내게 된다.

제대로 잠을 잔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회사를 나갈 때는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했지만, 휴가라고 새벽에 일어나 자정이 지나서 잤고, 낮잠조차 자질 못했으니 피로는 더 누적되었을 것이다.

3. 우울이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우울에 대해서 모른다. 슬프고 불행한 감정.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어 한사람의 삶을 침식해 들어올 때, 우울증이라고 하며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슬프고 불행한 것 자체를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염없이 슬프고 불행할 수 있으며, 삶이 송두리채 그 속에 휘말려들고 마침내 텅비어서 남는 것이 자살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어리거나 젊은 시절 우수의 표정이나 우울의 감정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아직 자신이 철이 들지 못했나보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비오는 교실 창 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국어선생의 실루엣이나 체크무늬의 셔츠 위로 목이 긴 아가씨가 카페의 귀퉁이에 홀로 앉아 입술을 끝을 깨물고 자신의 손톱 끝만 집요하게 응시하는 시간 끝에 피어오르는 침묵을, 우울 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가끔, 스물이 갓넘은 내가 왜 그토록 슬퍼했고 불행했던 것일까 하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놀랐다는 이유는 그때 슬퍼하고 괴로워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괴롭고 슬프던 그때의 상황을 다 잊어버린 탓도 있겠지만, 우울할 어떤 이유도 없다고 무책임하게 뇌까리는 현재의 상황이 그때보다 더욱 치명적이고 다급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멀어서 아득한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때야말로 뼈저리게 사랑해야 하고 처절하게 아파하며 하얗게 밤을 새웠어야 한다. 사랑하고 아파해야 할 때에 맥놓고 잠든 탓에, 남은 나날들이 희미한 추억 하나 간직하지 못하고 무료하며, 짜릿한 어제가 없었던 만큼 오늘도 심드렁하고, 내일 또한 기대할 것이 한개도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이라는 우울의 실상이며 뿌리이지만 해결될 기미는 요원하다.

모든 불면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한다면, 그 두려움은 지나간 과거의 잘못이나 무의미함 때문이며 지금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여 그릇되고 무의미한 나날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오늘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절규에 다름 아니다. 꼭두새벽에 문득 깨어남은 내일이 오늘로 발효되는 과정에 대한 공포이거나, 무의미함과 두려움 속에 자신의 삶이 표류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니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어제와 오늘이 찬란하고 즐거워 내일이 미치도록 기다려진다면, 잠잘 시간이 아까울 것이다. 그때의 잠이란 내일을 오늘로 만드는 찬란한 연금술이 된다. 우울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깨어있기보다 잠들어 있기를 탐하는 것은, 나의 삶의 일부는 권태이고 그 나머지는 우울이라는, 참으로 울적한 이야기다.

역설적이지만 불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염소 한마리 염소 두마리 염소 세마리 염소 …를 헤며 뒤척이거나 한 움큼 수면제를 입에 털어넣는 것이 아니라, 놀거나 일하느라 잠잘 시간이 어디 있냐는 소리가 입에 붙어야 하며, 잠들지 않기 위하여 한사코 버티지만 천근만근 다가온 잠이야말로 깊고 달콤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잠이 달콤하다는 것도 너무 오래된 추억같기만 하다.

20110808

This Post Has 10 Comments

  1. 후박나무

    음…. REM 수면에 장애가 있는 불면증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되네요….
    저도 일찍 잠이 들지만 꼭 3-5시 사이에 눈이 떠져버린다는….ㅠ

    1. 旅인

      장기기억에 문제(3일 전에 내가 무엇을 했지?하는 등)가 없다면 REM수면 장애는 아닐 것입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좋은 습관 탓이겠지요.^^

  2. 마가진

    아버지로서, 직장인으로서 무거움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모든 컨디션의 가장 중심에는 <충분한 수면>이 꼭 필요한 듯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더 편하셨기를 바랍니다.^^;

    1. 旅인

      아마 아버지로서, 직장인으로서 충실하지 못한 것과 요즘의 햇빛을 못받는 지하생활의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푹 잤는데 이렇게 푹 잘 경우에는 더 졸리고 더 자고 싶으니…

  3. 흰돌고래

    글의 마지막 부분 10여줄 정도가 특히나 마음에 와닿아요!
    찬란하게 살고싶어요. 달콤하게요.

    왠지 술과 여인님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남동생도 이번에 수능을 치른답니다..^^ ㅎㅎ

    1. 旅인

      저는 술을 싫어합니다. 이태백은 술 취한 다음 시를 짓는다던데,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이뻐보이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런데 흰돌고래님 집도 비상이겠네요.

      딸내미는 고3되고 공부하라고 하기만 하면 샤워하고 머리 빗고 조용해서 문 열어보면 침대에 쓰러져 자고… 그래서 공부하란 말 이제 안합니다.

  4. 선수

    저는 그저 화와 분노가 견딜수 없이 가득찬 상태가 아닐까 생각하던 적이 있었더랬어요 여전히 불면으로 고생하시는군요 저는 잠들기까지가 힘들어서 멜라토닌이 좀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여인님께는 그것과 상관이 없을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ㅡㅜ 따님께서 벌써 대학생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것인가요? 저는 중학생인줄로 알았어요 아니 이제 고등학생쯤 암턴 너무 뿌듯하실것 같아요 ^^^와~ 동생 학교 들어갈때 그 환하던 엄마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ㅎㅎ

    1. 旅인

      멜라토닌은 먹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웬만한 약(감기약도)은 당분간 먹지 말라고 해서요. 이제 병원의 기한도 끝났으니 복용을 해볼 예정입니다.

      딸내미요? 빨리 키워서 시집보내서 집 안의 우환을 사위에게 전가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아마 그때 집 사람과 저는 하이파이브를 할 것 같다는…

  5. 선수

    얼마전에 한국티브이 특집인지 4부작 삼국지 기행을 해주는걸 보았는데 장강 삼국지 유적지를 테마로 따라 크루즈를 하는데 뭔가 장쾌하벼 고요하듯 압도하는 분위기도 풍광도 어찌 그리 멋있던지요? 나중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역시 이백이 술을 아니 마실수 없었겠다 참으로 시를 지을만 했겠다 생각했더랍니다 하핫

    1. 旅인

      적벽부적인 분위기인가 보내요.
      그런데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배를 타고 동정호에서 빠져나가 장강과 합류하여 무한삼진을 한번 둘러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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