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종점에서

새로 이사 온 곳은 종점에서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있다.

종점이라기 보다는 먼 곳에서 달려온 고속버스가 멈춰서는 곳이니, 서울로 들어오거나 지방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서성이거나 우왕좌왕하는 곳, 서울의 끄트머리인 셈이다.

종점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이유는 이 곳의 풍경이 낡고 허름한 탓이다. 전철에서 내려서 우산을 펼쳐들고 맞은 편 터미널 건물을 바라보면 흐리멍텅한 잿빛인 데, 그 앞을 서성이는 행인의 행색은 2박 3일의 여행에 찌들은 단벌이거나, 남쪽 지방으로 놀러가는 반바지, 모자, 배낭 등으로 다소 과장된 옷차림은 내리는 빗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종점에서는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고 들떠 있을 뿐이다.

한강을 우르르 건너온 전철이 빗물을 뚝뚝 흘리며 역에 서고, 승강구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토해져 나온 사람들은 순식간에 이쪽 저쪽 변두리의 어딘가로 물빠지듯 사라져버린다. 바뀐 신호등을 따라 나도 도시의 한 쪽 끄트머리로 사라지기 위하여 길을 건넌다. 날림공사인지 터미널의 이면도로는 오고 가는 고속버스의 하중을 버티지 못하여 도로가 파이고 물이 고였다. 터미널로 드나는 버스들은 흙탕물을 뿌리며 좌우로 출렁거린다. 웅덩이를 피해서 언덕 위의 새로 이사간 집으로 간다.

올해 장마는 길고 지루했다.

요즘 서울 날씨는 어떠세요? 먼 곳에 사는 누군가 묻는다.

불면이 더 심해진 것은 지하생활 탓일 것이다.

아침 7시에 지하철을 탄 나는, 회사 앞 역에서 연결된 통로를 따라 지하 1층에 있는 TFT 사무실로 들어선다. 점심은 대충 지하 2층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해결한다. 퇴근 후에 회사 앞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네 지하철 입구를 벗어나 하늘을 볼 때가 저녁 8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다. 이른바 나는 지하생활자이다.

나에게 허락된 하루의 빛은 손바닥만 하고, 생활은 그늘에 자라는 콩나무처럼 노랗다.

햇볕을 받지 못한 나의 신경계는 자꾸 착란을 일으킨다. 새벽 세시, 다섯시, 어떤 때는 한시. 무차별적으로 깬다. 몸은 피곤한데, 깨어난 정신은 너무 뚜렷하다. 뚜렷한 정신을 달래기 위하여 한두시간 케이블 티브이를 본 후 다시 잔다.

창이 없는 지하생활자인 나에게 날씨란 낯설고 익명이다. 구글이나 아이폰의 날씨가 아니면 지금 밖에 해가 밝게 빛나고 있는지 비가 오는지 모른다. 하지만 구글 가젯의 날씨는 믿을 수 없다. 지난 몇주동안 구글 가젯의 날씨에는 몇번인가 해가 떴다. 햇빛을 보기 위하여 지상으로 올라가보면 비가 내렸다. 그래서 나는 아이폰의 날씨만 믿기로 했다. 오늘 아이폰의 날씨는 해가 떴고 약간의 구름이다.

종점으로 이사온 후 좋은 점은, 한강을 넘어온 전철이 지상 삼사층 높이의 교각 위를 달리며 변두리의 남루한 지상을 굽어본 다음, 시내로 접어들 무렵, 지하로 가라앉는다는 점이다.

비록 공장건물과 변두리의 퇴락한 뒷골목일 망정, 잃어버렸던 아침의 풍경과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빛을 맞이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나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퇴근길에 공장과 뒷골목 위로 내려앉는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에 속하는 일이다.

이제 서울의 날씨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위는 확보한 셈이다.

이사를 오기 전, 아내는 지하에 나를 위하여 별도의 작업실이라는 것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전혀 모른다. 내가 해야 할 작업이란 필시 아내가 싫어하는 책들과 오디오와 함께 아내의 눈에서 사라져 주는 일일 것이다.

아내는 이사 전날 모든 것이 잘 꾸며졌다고 했다.

이사하는 날, 책들과 함께 오디오를 간신히 밀어넣고 나자, 쇼파와 아내에게 필요없는 몇몇가지 물건을 더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다. 우격다짐으로 짐들을 밀어넣은 그곳에 곰팡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뱀하고는 함께 살아도 곰팡이하고는 같이 살고 싶지 않다. 좁은 지하에 들어선 짐들을 보며 폐소공포증이란 얼마나 절박한 심정일까 알 것만 같다.

지하임에도 93.1MHz는 오히려 잘 잡힌다. 이제 소리를 높히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정기검진 결과는 왼쪽 귀의 청력이 약해졌단다.

어제 오후부터 날씨가 개기 시작. 오늘부터 폭염 시작이다.

20110718

This Post Has 6 Comments

  1. 후박나무

    음… 사람에겐 햇볕이 참 소중한데…..
    이사후 조금이나마 해바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신것 같아 다행스럽네요….

    1. 旅인

      조만간 6개월 간의 지하생활도 종을 치고 다른 사무실로 이전을 할 것 같습니다.

  2. 마가진

    종점에선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고 들떠있다는 말씀이 정말 멋있습니다. +.+

    여인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어릴 때 어린이 잡지에서 읽었던 미래도시의 풍경이 언듯 생각납니다.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모님께선 건강해지셨는지요? 곧 휴가철이 되면 뜨거운 태양아래로 편한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 <눈에서 사라져 주는 것> 저도 모르게 킥킥대었습니다.^^;;

    1. 旅인

      그러고 보니 제 이사 이야기가 수평적이 아닌 수직스러운 이야기였네요.
      집사람에게 폐소공포증 이야기를 하며 <눈에서 사라져 주기가 싫다>고 하니까 쇼파를 오늘이라도 치우겠답니다.

  3. 원영­­

    바깥 날씨는 그늘에 숨은 이파리마저 바짝바짝 말려대는 날씨인데,
    왠지 여인님의 글을 읽다 보니, 조금 눅눅해져 버렸습니다.

    저에게도 가진 취미가 많은데, 언젠가는 저도 땅을 파고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1. 旅인

      며칠간 구름 한점없이 맑던 날이 오늘 아침에 깨어나보니 잔뜩 찌푸렸네요.

      원영님께선 그래도 밖으로 돌아다니는 취미가 있지만 저는 방콕형 취미라 땅 밑으로 추방된 것입니다.^^ 회사에서 집에서도 땅 밑이라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땅 위를 지키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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