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에 필이 꽂히다.

지난 일요일, 서랍을 정리하다보니 펜이 나왔다. 글씨를 써 본다. 글씨가 가늘어 답답하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펜을 주문했다. 주문한 것은 펜대 하나와 펜촉 3개, 그리고 잉크. 이 네가지 물건 가운데 나를 만족시킨 것은 펜촉 하나다.

집에서 쓴, 찢어진 기억의 22장 10절

5000원 짜리 펜대(위의 것)는 외관은 좀 나아보일 지 몰라도, 7~800원 하는 B급 펜대(아래의 것)보다 그립 감이 떨어진다. 잉크는 제이허빈(J.Herbin)이라는 명품이라지만 뭐가 좋은지 잘모르겠다. 펜촉은 브라우스의 오너먼트 0.5mm와 0.75mm 두 촉을 사고, 드로잉용 한 촉을 샀다. 드로잉용은 불량이라 다시 배달될 예정이다.

오너먼트 펜촉은 드로잉이나 범용 펜촉이 아닌 필기용이다. 그래서 필선의 굵기가 0.3~0.4mm인 일반 G펜촉에 비하여 굵은 0.75mm에서 시작하는데, 전문매장이라 0.5mm짜리도 있어서 함께 주문을 했다. 하지만 0.5mm 짜리의 필기감은 좋지 않아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사무실에서 쓴, K로 또 돌아가는 오정

하지만 0.75mm짜리를 펜촉에 끼우고 글씨를 쓰는 순간, 갑자기 행복해졌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만년필에는 없는 난창난창한 필기감이 있다. 내가 쓰는 만년필 또한 굵기는 0.75mm이다. 만년필의 굵기는 더 굵어지지도 얇아지지도 않는 둔탁한 굵기인데 반하여, 펜촉의 굵기는 가해지는 힘에 따라 늘고 주는 신축성이 있다. 그리고 펜촉이 종이 위에 흐르는 사각거림. 갑자기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Ornament 펜촉

이 오너먼트 펜촉은 위, 아래로 덮개가 있다. 덮개는 네이비블루로 반짝이기 때문에 마치 짙은 남빛의 돌로 펜촉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덮개는 예전의 천자펜촉의 아래의 덮개처럼 잉크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잉크를 한번 찍으면 반장 정도 쓸 수 있다.

This Post Has 8 Comments

  1. 마가진

    앗. 몽블랑 잉크군요. 하얀 눈덮인 알프스 산봉우리. ^^

    손글씨.. 그것도 펜글씨로 쓴 편지는 참 멋있을 것 같습니다.
    여인님께선 글씨도 잘쓰시는군요.

    저는 가끔 제가 쓴 글씨도 못알아 볼 만큼 악필입니다. ㅡㅜ;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데, 아무래도 인격적으로 문제가 큰 듯합니다.

    1. 旅인

      제 글씨를 보고 손에 익은 글씨가 아닌 그리는 글씨의 전형이라고 합니다. 본래 제 글씨의 본 바탕이 악필인데 잘 쓰려고 하다 보니 그리는 글씨가 되었습니다.

      불 만 끄면 실력이 나옵니다.

  2. 컴포지션

    아버지가 펜글씨책과 싸구려 펜대를 사주시고 필기연습하라고 하셨던게 문득 기억나네요..
    뭐 맨날 연습은 내팽게쳐놓고 놀기만해대서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악필입니다. 하핫…
    연습이라도 해야할까요.. 🙂

    1. 旅인

      컴포지션님 정말 오랫만입니다.

      아버님께서 사주기만 하실 것이 아니라, “오늘 23쪽 다섯번 써라. 저녁에 보자.”라고 하셨으면 될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3. 후박나무

    사각사각 펜 촉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는 소리, 참 좋지요^ ^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물씬 풍기는….
    저도 오늘은 종이위에 뭔가 끄적끄적 해보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1. 旅인

      좋은 펜대를 구하려고 했는데, 새로 구입한 오천원짜리 보다 천원짜리 B급 펜대(펜대 락카를 칠한 것은 A급)가 월등히 좋습니다.

      어떤 호사가의 글을 보니, 얇은 스틸로 속이 텅비게 만든 명품 펜대가 있다고 합니다. 가볍게 만들기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종이와 펜촉의 사각대는 마찰소리를 텅빈 펜대 속에서 울리게 하고 앏은 쇠를 통하여 손가락이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답니다.

      편지를 써서 그리운 님들께 한번 보내보시지요.

  4. 흰돌고래

    와,
    저는 만년필도 펜도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네요. ㅠ.ㅠ
    ㅋㅋ
    신기해요 ^-^

    1. 旅인

      만년필과 같은 것과 일단 친해지면 볼펜을 잘 쓰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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